『언더 그라운드(1998)』 리뷰

이 책은 1995년 사이비종교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사건'을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논픽션 저서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일본 작가 중에 한 사람이건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읽으려 해도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 현실이었는데 이번 『언더 그라운드』는 사이비 종교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일본의 옴진리교와 관련된 사건을 다룬 책이라는 데서 흥미가 가서 빌려오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근방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빌려오게 된 책은 1998년도 버전 번역본인데, 2010년에 양장본과 거기에 더 추가본이 더해져서 두 권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추가 버전도 나중에 찾아서 읽어봐야 할 성싶은데요. 책이 낡은 편은 아니었지만 좀 오래된 재질에 활자가 많고, 두께도 제법 있어서 빌려온 지 며칠 되었지만 다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마 내용이 비슷한 인터뷰가 반복되는 형식이라 어느 정도 읽고 나면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법 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의 피해자들은 전체 피해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인데, 이것은 악몽 같은 사건을 다시 기억하기 싫었던 탓도 있고 당시 사건이 터졌을 무렵 자극적인 요소만을 찾은 언론 보도에 피해자들이 치를 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를 피한 경향도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 언론의 무지함과 과격함이 어느 정도인지 읽는 내내 감이 잡히던데 이들이 하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본 것은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잡지에 투고한 칼럼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잊히기 쉬운 피해자들의 피해 특히 2차적 피해에 대해 알릴 필요성을 느낀 탓인데, 대개 피해자들이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실명을 밝히길 원치 않아 여기 실린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라고 다 같은 피해자가 아니라 상황이 제각각인데 우연히 사린가스가 터진 구역을 지나가다가 간접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고, 사린가스에 직접 노출되어 중상이나 경상을 입은 피해자들도 있으며, 그 지하철의 역무원이나 매점상처럼 피해 구역에서 일을 하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사망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유족이 인터뷰를 대신한 경우도 있고요. 책에서 간단하게나마 피해자들이 어디서 언제 태어나 현재의 상황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이들은 사린가스 테러를 담당한 옴진리교 내의 '엘리트' 간부들에 비하면 진짜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거품경제가 끝난 시기에 쓰인 책이라 그런지,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피해를 입고 사람들이 쓰러진 것을 보았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회사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다 나중에 병원에 입원된 경우가 상당한데요.
이걸 단순 개인주의나 각박함이라고 보긴 어렵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가 인터뷰에 여러 번 나온 것으로 보아 그만큼 당시 피해자들도 하루하루가 필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어요. 대다수의 사람이 사린가스 중독으로 일어난 시야협착 증상이나 메슥거림, 두통이나 현기증 증상을 빈혈, 감기, 혈압의 문제로 돌렸던 것은 큰 피해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일부러 회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큰 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병원에 가면 그것이 사실이 될까 봐 사람들이 병원을 가지 않는 것처럼요. 물론 피해자들의 상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병원으로 옮기는 걸 도운 일반 시민들도 많았다고 하고 그런 인물들 중에서도 2차 피해자가 생겼다고요.
책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마는 사린가스 테러 사건은 당장의 피해만이 아니라 인터뷰가 행해진 시점에서도 후유증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피로함이나 두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시력저하가 계속되었다거나 심한 경우는 식물인간 상태가 된 피해자도 있었고요. 책에서는 의사의 인터뷰를 실어 PTSD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는데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몸의 이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어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들 말로는 괜찮다 하지만 사건이 있은 직후 지하철 타는 게 두려워지거나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거나 악몽을 꾸거나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거나 하는 등 이상이 있는데 PTSD에 관해 어설프게 찾아본 자료만 봐도 인간이 큰 사건이나 사고를 경험했을 때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게 잘 드러나는 책입니다. 흔히 창작물들은 큰 사건사고를 경험한 인간들이 후에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는 결말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창작물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까요. 알게 모르게 내부에 곪아가는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나약한 취급을 하는 현실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언더 그라운드』는 그런 창작물들이 심어주는 착각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언더 그라운드』는 당시 사건의 배경인 도쿄 지하철이 지하에 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인간 내면을 살피기 위해서 붙여진 제목 같습니다. 저자의 마지막 글에서도 알 수 있는데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혼자만 간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동시에 옴진리교의 행동에 비판을 하면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드러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드러냈고 그 결과가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라고 하는데, 쾌락 살인마들이 자신만의 망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심보가 이들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나온 소설이 바로 저자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고 하더군요.
또 특이한 점은 책에 실린 글 중 한 피해자의 인터뷰에 인용된 한국 속담입니다. 사업 문제로 한국을 자주 왕래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게 된 인물인데, 한국어를 배우면서 알게 된 한국 속담 중 '맞은 사람을 발 뻗고 자지만 때린 사람은 움츠리고 잔다(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란 속담이 맘에 든다며 현재의 심정을 비유합니다. 어린 시절 제가 이 속담을 접했을 땐 잘못한 인간이 반성을 안 하는데 되는 소리냐며 반발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어렴풋하게 그 속담의 진짜 의도가 파악이 되는데, 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면 이들이 훗날 가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는 엄연히 질적으로 다르게 된다는 의미인 거 같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아도 적을 사방으로 만든, 혹은 그런 심보를 간직한 인간들이 과연 무사하게 살아가겠습니까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옴진리교는 와해되었고 테러범들도 수사망을 피해 도망가다가 붙들렸는데 어떤 식으로 죄의 대가를 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