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예전에 도서관에서 표지가 떨어져 갈 정도로 낡은 책을 발견하여 흥미롭게 읽었다가 나중엔 아예 책에 반해버려서 소장을 했을 정도입니다. 이 소설이 영화화된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언제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긴 좋겠단 생각은 했었어요. 영화 개봉 이후 출간된 책의 표지가 달라진 기억도 있고요. 어쨌든 영화가 궁금하긴 해도 딱히 영화를 찾아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그냥저냥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잊고 있었다가 LTE 비디오 포털(현 유플러스 모바일 TV)의 무료 특집관에서 서비스해 주는 영화 중에 바로 이 영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망설이지 않고 재생을 눌렀습니다. 일단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 궁금하기도 해서 영화 평을 간략하게 살펴보긴 했는데 영화의 내용이 원작에 상당히 근접하다란 글을 본 적 있어 일단 전개나 스포일러는 대강 다 알고 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궁금한 것은 이 광기의 천재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재주를 어떻게 그려 나가느냐였는데요. 소설은 텍스트로 당시 프랑스혁명 이전이라 여겨지는 시대에 존재한 어마어마한 악취, 당시 유럽 상을 그린 역사책들을 찾아보면 확인가능한 가공할 정도의 악취와 세균의 소굴이었던 그곳을 텍스트로써 생생하게 전달했다면 영화는 최대한 보이는 시각 이미지로써 보는 이들에게 그곳의 냄새를 전달하려 듭니다. 다만 아쉽게도 악취에 대해서는 이미지만으로도 상상이 충분하였으나 향기에 관해서는 어딘가 거리감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 영상으로나마 그 향기의 실체를 전달하려 한 노고는 인정하겠지만은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고요. 하여간 영화의 이런 특성상 흥미를 끌게 된 것은 영화가 그려내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허망하고 강렬한 인생의 흐름일 텐데요.

영화는 소설의 전개와는 달리 그의 출생이 아니라 사형 집행 전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그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액자식 구성을 취합니다. 대개 영화의 전개가 소설의 전개와 일치하긴 하나 중간중간 과감히 생략된 부분이 많은데 어머니의 처형 후 유모와 신부를 거치는 장면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닌지라 빠진 듯하며 두 번째 유모인 가이아르 부인의 최후도 약간 달라진 구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향수 제조 장인 발디니에게 독립하여 그라스로 향하는 중 에스피나스 후작에게 의탁하는 장면도 삭제되었으며 몇몇 부분도 소설 상의 묘사와 약간 다르지만 내용 전개엔 큰 문제가 없이 처리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그려지는 당시 고아들이 겪는 학대라거나, 빈민들의 비위생적인 생활 상 또는 발디니의 집이 무너지는 장면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랄지 이런 게 묘사되어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중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란 생각도 더불어 들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주인공인 그르누이가 자신의 체취가 없음을 자각하고 그를 대체할 향기를 얻기 위해 여자들을 살해하여 재료로 쓰려는 등 꽤 섬뜩한 전개를 향하지만 영화상에선 좀 본의 아닌 유머 코드 같은 것도 삽입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냄새 없는 그르누이의 존재감 없는 설정 때문에 희생자의 거처에 숨어들어도 발각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범인을 악마라 믿는 내용도 영화에서 언급되고요. 늘어가는 희생자 때문에 붕괴하는 공동체의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재미있는 것은 악마의 소행이라며 종교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장면에서는 수녀까지도 그르누이의 희생자가 되는 장면이 교차되어 나와 이 부분에선 영화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할까요. 그리고 향기 채취 방법이 소설 상에서도 장난이 아닌지라 영화 상의 그 모습은 솔직히 성인물에 가까운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 영화 등급이 15세라는 것도 좀 놀라운 부분이었어요.

그런데 막판에 들어서면 제가 본 소설과 영화의 해석이 많이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르누이가 처음 매혹적인 향기를 느껴 살해한 여성의 묘사는 소설에선 그르누이가 완벽한 향수를 만들어내는데 어느 정도 계기를 주는 것처럼 묘사되던데 반해 여기선 마치 그르누이가 여성의 향기에 끌려갔으면서도 마치 사랑을 느낀 것과 같이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처형장의 마지막 장면마저도 영화가 그려내는 그르누이의 심리와 소설의 심리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어요. 소설 상의 그르누이가 향수를 완성한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증오’, 날 때부터 인간들을 향해 가진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라 생각해서, 무색무취의 자신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주는 방법은 자신의 증오를 표현하는 것이고 또 그 보답으로 자신도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는 달리 그는 만들어낸 향기로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사람들의 애정을 느끼려 하지만 향기가 묻은 손수건이 날아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그르누이 아닌 그것에 끌려 광기에 빠지면서 사람들의 애정은 그르누이가 아닌 오로지 향수가 뿜어낸 향기에 있단 것을 보여주고 그르누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절망에 빠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그르누이의 환상, 그르누이가 처음으로 살해한 여성의 환영이 그를 사랑하여 받아들이는 묘사를 함으로써 더 확실해지지요. 즉 소설 상의 그르누이와 영화 상의 그르누이가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가 행한 방법, 그에 따른 결과는 일단 영화와 소설이 동일하나 그 행동에 기반이 된 주인공의 심리는 소설과 영화가 정반대였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주인공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영화의 결말은 소설과 유사하게 진행되어 향수를 모조리 소진한 그르누이가 파리의 부랑자와 죄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더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같은 향기에 반응하더라도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냐에 따라 그 반응이 천차만별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천상의 향수나 다를 바 없는지라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향기를 뿜은 그르누이를 숭배하는데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사정이 어쨌든 일단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단 사실이고 향기에 대한 반응도 미칠 듯한 성욕에 사로잡혀 광란의 한때를 연출하였으며 그것을 나중에는 쪽팔려서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파리의 부랑자들은 소설 상의 묘사를 본다면 크든 작든 죄를 지은 인간들이며 누구 하나 사람을 사랑한 적도 없는 인간 말종들이라 그들은 향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르누이를 갖겠다며 달려들어 그를 살해하고 뜯어먹는 짓을 벌이는데 일단 그 행동 양상이 어땠든 간에 그들이 한 일은 '사랑'이었다고 묘사되며 거기다 사랑으로 저지른 일 때문에 뭔가 쑥스러움과 만족감을 느낀다는 묘사까지 나온다는 점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다는 사실은 실은 욕망 때문에 뭐든 한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섬뜩한 결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