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권 리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드디어 16권입니다. 이번 16권의 내용이 '정조실록'이긴 합니다만 그 전대인 영조가 유달리 장수한 왕이라서 그런지 초반에도 꽤나 존재감을 보입니다. 보통은 전권 마지막에 왕이 승하하고 바로 다음 권에서 새왕이 등극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반면에 초반 파트에서 영조가 숨을 거두고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르는데요. 영조란 왕은 평가도 평가고, 전해지는 일화도 일화지만은 참으로 여러모로 독특한 왕이라는 느낌이 든달까요. 정조실록이 시작된 권에서까지 그 정도로 존재감을 보이니 말입니다. 영조 생전 당파 견제 차원에서 척신들을 기용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필요성에 의한 것이지만은 정조 초만 하더라도 이들의 세력이 커져 정조의 가장 첫 임무는 이 척신 세력을 꺾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거기다 비록 자신의 편이라 하더라도 권력의 맛에 취해 타락해 가는 홍국영마저 끊어낼 정도의 강단을 갖춥니다.
영정조 시대하면 대표적인 것이 탕평책인데, 전권에서 영조시대의 탕평책은 원래의 목적을 잃고 노론을 견제하는 차원 정도로 떨어진 데 반해 정조는 할아버지대보다 균등하게 대신들을 기용합니다. 그 증거로 당시 주류세력에 제외된 남인출신의 채제공을 정승으로 기용하지요. 이분 이야기는 예전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였나요. 초상화와 관련된 임무로 주인공인 신윤복 일행에게 내려진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여간 정조의 탕평책은 한 당파의 독재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 분명했고, 심지어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벽파들마저 포용합니다. 국사책에 나오는 벽파와 시파라는 단어가 여기서도 언급됩니다. 그야말로 정조가 지향한 바가 정도전과 태종에서부터 이어진 유교적 정치 시스템의 구상을 목표로 했음이 드러납니다. 문제는 대신들이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지만...
정조 시대가 조선후기 사회에서 꽤 이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정조가 시행한 많은 개혁정책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텐데 그동안 개혁을 부르짖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배층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 미적거리던 것을 정조가 드디어 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자면 독점상인들의 횡포의 바탕이 된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서얼들이 진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포악한 수령들을 단속하는 등. 정치적인 것들과 상관없이 정조의 개인적인 일화나 성격만을 본다면 그야말로 문무에 완벽한 왕이기도 했습니다. 당대 대신들 중에서 정조의 학문적 깊이를 따라가는 자가 없다고 할 정도였던 데다가 무예도 뛰어났다고 실록이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즉 자질도 충만한 데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고 민생안정에도 신경을 쓴 완벽한 왕이었지만 만화에선 그 한계도 잊지 않고 단점을 지적합니다. 정조의 개혁정책도 어디까지나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해당되는 것이기에 근본적인 해결을 보이지 못했고, 당시 세계정세의 변화상을 가늠하지 않았단 점 또한 지적됩니다.
숙종-영조대부터 대동법과 균역법을 개혁하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수탈의 도구가 된 것은 환곡제인데 일종의 고리대금 내지 사채에 가까운 이 방식이 이 시대에 들어서면 백성들의 삶을 가장 크게 좀 먹게 됩니다. 하나 가고 나면 더 큰 게 찾아온다고 할까요. 만화 상에선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다는 것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다음 권에서도 문제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확실힌 개혁의 한계가 보이긴 합니다. 거기다 정조 개인적으로 보자면 평생 원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을 풀지도 못했단 점도 있고요. 거기다 자신이 죽고 난 뒤 세자의 버팀목을 찾기 위해 결국 척신을 기용했단 점도 지적됩니다. 정치적인 사항과 상관없이 시대배경적으로 따지자면 서서히 재야의 학자들 사이에 북학과 실학이 논의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천주교가 민심을 얻는 등의 일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등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는데, 아직 천주교가 사대부들에게 배격되지만 정조 시대에서는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조 스스로가 정학이 바로 서면 해결된다고 믿는 케이스였으므로.
어쨌거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조와 같은 왕을 앞으로 다시 보긴 힘들게 됐습니다. 어차피 조선왕조실록도 몇 권이면 끝나가고 있으니까요. 만화를 다 봐도 그렇고 작가분의 후기를 읽어봐도 그렇지만 세종대왕 못지않은 자질을 가진 왕임에도 결국 정조의 개혁정치는 미완으로 끝난 감이 있는데, 작가분의 말을 따르자면 그것은 시대의 오르막길에 있는 것과 내리막길에 있는 것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듯... 근데 생김새도 초반에 잘생겼다가 후반에 후덕해지는 게 좀 닮아가는 모양. 거기다 안경을 썼다는 이야기 때문에 후반기에는 거의 안경을 쓴 모습으로 나옵니다. 후기에 실려있는 재미난 이야기 중 하나는 전대의 충신들을 기리는 일이 영조대부터 있어왔는데, 이순신 장군님의 진면목을 알리고 영웅화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 것이 바로 정조였다는 겁니다. 뛰어난 충신들의 업적을 부각해 충의를 강조하려는 정치적인 차원의 사업이었겠지만. 어쩌면 팬이셨을지도... 증조부(숙종)는 삼국지 관우 팬인데 증손자는 이순신장군님 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