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과 만화

『십이국기 5 : 히쇼의 새』 리뷰

0I사금 2025. 1.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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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는 마을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십이국기』 소설 시리즈는 오래전에 절판된 ‘조은세상’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십이국기』 시리즈를 제대로 읽어보고 나서 흥미가 생겨 관련 자료들을 이리저리 찾아본 결과 먼저 번역되어 나온 책들이 절판되고 난 후 엘릭시르에서 새로 나온 외전을 포함 전권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요. 외국 소설들 중 좀 유명한 책들 같은 경우는 출판본이 여러 가지인 경우 책이 종류별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은 이것은 좀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도서관을 찾아가 보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는데 이 ‘히쇼의 새’는 엘릭시르에서 새로 출간된 『십이국기』 시리즈 중에서 가장 먼저 접하고 네이버 블로그에 리뷰를 썼던 책이기도 합니다. 티스토리 리뷰 자체는 책의 순서대로 올리게 되었지만요. 발견했을 당시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되었을뿐더러 책의 사이즈도 작고 거기다 삽화까지 실려 있는 등 소장하기엔 딱 좋은 스타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아쉽게도 겉표지는 거추장스러우니 도서관 측에서 벗겨버린 모양이었어요.


책에 실린 단편은 제목의 ‘히쇼의 새’와 나머지 ‘낙조의 옥’, ‘청조란’, '풍신'을 포함 네 편인데 이 중 앞의 두편은 『십이국기』 자료를 찾으면서 대강 어떤 내용인지 간추린 것을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몰랐다고 할까요. ‘히쇼의 새’는 경국에서 왕들을 모시면서 경사나 제의에서 화살로 맞추는 도작(도자기)을 만드는 하급관리 나씨(羅氏)인 히쇼의 이야기로 히쇼는 국정과 상관없는 임무를 맡고 있지만 나름 왕들이 백성의 고통을 알아주는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담은 도자기를 보이는데 이 도자기가 새의 모양으로 날아가 화살에 맞아 깨지면서 다른 모양으로 변화한다는 묘사를 보면 이 기술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십이국 내의 특별한 기술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십이국 세계관에선 선인이라던가 하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니. 하지만 경에는 대대로 자질 없는 여왕(女王)들이 섰고 그나마 히쇼의 뜻을 짐작한 전대 왕인 여왕(予王)조차 그 모습이 너무 참담하다며 그것을 외면하여 히쇼는 실망하게 되고 심지어 이번에 새로 들어선 왕조차 여왕이며 거기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태과 출신이란 점에 더우 더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도작을 선보이는 날 새로운 경왕인 요코는 히쇼의 뜻을 알아주면서 나름 희망이 있음을 암시하며 끝나게 되는데요. 보면 십이국 세계는 현실이랑 생식 방법이 달라서인지 몰라도 남녀 차별이란 게 거의 없음에도 경국은 대대로 여왕들이 자질이 없어 나라를 말아먹는 데 한몫 했기 때문에 공교롭게 다음 왕위에 들어선 요코 역시 여자라는 이유로 관리나 백성들의 편견과 불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는데 실제로 요코 입장에서 보면 좀 억울한 게 요코는 갓 왕위에 오른지라 나라의 뭘 말아먹은 것도 아니고 말아먹을 낌새를 보이려고 해도 그렇게 할 만한 게 없는 형편임에도 오로지 전대들이랑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안 들어도 될 욕을 들어먹고 입는 입장이에요. 원래 요코 같은 경우는 현실 일본에서 살았을 때에도 ‘여자는 이래야 해 저래야 해’ 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에 동조하는 어머니 밑에서 압박받으며 자랐기에 이런 상황이 참 의미심장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후반부인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이 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지도 모르지만.


다른 단편인 ‘낙조의 옥’은 『십이국기』 본편에선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잠시 지나가듯 언급되던 유(류)국의 이야기인데, 묘하게도 십이국의 장편과 단편들 중 유국은 순국과 함께 잘 드러나지 않은 나라입니다. 외전인 화서의 꿈에서 연왕과 주나라 왕자의 대화를 통해 이 유국의 왕이 어떤 특별함 없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특이하단 점이 언급된 점은 있는데 거기서도 유국이 기울어가는 점이 잠깐이나마 언급되듯 이번 소설 내에서 중심이 되는 살인사건의 판결이 지지부진해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유국 왕이 사건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더 심화된 게 아니냐는 암시도 있고요. ‘낙조의 옥’에서 중심이 된 살인마 슈다쓰는 그야말로 현대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같은 놈으로 솔직히 소설 내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이런 놈은 죽어도 싸다’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악행을 일삼은 인물이며 심지어 반성의 기미도 없고 어차피 자기는 더 내려갈 데도 없으니 오히려 사형을 받으면 자기가 이기는 것이라고 믿는 일그러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판관에 해당할 에이코와 그 휘하의 관리들이 사형을 망설이는 이유는 일단 유국에서 사형이 폐지된 지 오래라는 점과 만약 치안이 나빠졌고 본보기로 사형을 택한다 해도 이것이 과연 유국의 범죄를 막는데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만약 사형을 한번 허용하게 되면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범죄에도 사형이 남발되어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사형에 둔감해져서 사람들의 일탈을 막기 위해 방국처럼 잔인한 형벌들이 쓰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슈다쓰가 암만 악마 같은 인간이라 하지만 판결을 내려야 할 에이코를 비롯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거부감, 말하자면 죽일 놈이라 죽는 꼴을 보고 싶긴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손으로 하기에는 꺼려지는 그런 점 때문에 관리들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 슈다쓰의 뻔뻔한 작태와 백성과 피해 유족들의 원성,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명백해 보이는 왕의 태도 등 에이코 일행을 사형을 내리고 오히려 슈다쓰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 기뻐하며 굉장히 찜찜한 결말로 소설이 마무리되는데요.

 

이번 단편은 굉장히 현실과 겹치는 구석이 있고 또한 현실에서도 다뤄지는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어 여러모로 와 닿는 부분이 많은 단편이기도 했습니다. 뭐 결말은 어쨌거나 유국은 기울어가며 그것은 에이코와 같은 개인의 힘으로 막기 어렵다는 이야기지요. 세 번째 소설인 ‘청조란’은 역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하급 관리이자 소꿉친구인 효추와 호코가 산의 너도밤나무에 병이 퍼진다는 것을 알고 너도밤나무가 산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찾아올 재앙(짐승의 습격이나 산사태 등)을 예견하여 그 병을 치료할 약을 찾으러 고생하는 내용입니다. 앞의 두 나라보다 망국의 조짐이 상당한 배경에다가 주인공이 효추와 호코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 주위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참으로 답답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자신들은 이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고 버티는 주인공들 모습이 참 안쓰럽다 할지 복잡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가 어디의 이야기인지 자세히 언급되는 게 없어서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막판에 유국의 국경이란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연왕이 제대로 서기 전 안국의 이야기라고 추측할 수 있겠네요.

 

마지막 소설인 ‘풍신’은 경국 여왕이 여자들은 모조리 추방이라는 미친 명령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나 가족과 소꿉친구를 모조리 잃은 소녀 렌카가 나라가 막장 상황임에도 ‘책력(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을 만드는 데 여념 없는 관리들에게 의탁한 뒤 그들의 무심함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나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이야기는 자기 임무를 방기하지 말고 거친 세상을 견디면 언젠가 반드시 희망이 오리란 의미일지도 모르겠군요. 이번 ‘히쇼의 새’에 실린 단편의 특이점으로 전편의 이야기들이 선택된 왕이나 그를 선택할 기린들의 이야기가 중점이 되어 ‘운명적으로 선택받은 이’들이 주인공이나 다를 바 없었다면 이번에 실린 소설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십이국 내에서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일반인이나 하급 관리들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옛날의 중국과 많이 유사하고 이세계의 이야기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히려 읽는 이들에게 더 와닿지 않을까 싶었는데 소설 속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말이 나라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누가 왕이 되는지 이들과는 큰 관련이 없으며 그저 새 왕이 서서 나라가 안정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란 느낌이 많이 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느끼는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안정적으로 살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바람과도 많이 겹쳐지는데요. 대개 창작물 특히 판타지 같은 작품에서 신화의 토대를 많이 따라가서인지 주인공들은 혈통이나 예언의 무언가처럼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이들이 도맡으며 평범함과는 애초에 선을 긋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판타지 소설에서 단편이라도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빗대어 그린 것은 거의 처음 접해보는 것 같아서 매우 신선했다고 할까요?

참고로 책에 실린 삽화는 다음과 같은데 이렇게 컬러버전이 삽입된 것은 처음 보는 지라 좀 흐리게 찍혔지만 한번 올려봅니다.

그리고 십이국의 지도를 보자니 십이국 세계관에선 서쪽으로 치우칠수록 잘 사는 나라가 많다는 느낌입니다. 일단 왕이 없는 방국 정도를 빼면 서쪽과 남쪽 사이에 포진한 공국, 범국, 재국, 주국, 연국은 분란이 없이 일단 평화로운 나라들인 반면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은 정보가 아예 없는 순국을 제외하면 살기 좋은 나라는 안국과 그나마 왕이 서서 기틀이 새로 잡혀가는 경국 정도. 십이국 세계에선 서쪽일수록 잘 산다거나? 또 번역에서 명칭이 이름을 제외하면 거의 한자음 그대로 표기되는 경우라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기린을 뜻하는 재보를 타이호로 쓰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는데, 기린들 이름은 이번 단편들에서 안 나와서 뭐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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