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국기 4 :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上』 리뷰
이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은 기존 시리즈들과는 다르게 시점이 전편보다 많은데 일단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들이 요코, 쇼케이, 스즈 세 사람이란 게 크게 작용합니다. 그리고 요코를 제외한 스즈와 쇼케이가 정신 차리기 전까진 솔직히 요샛말로 발암이라 할 정도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인간들이라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때 이 두 캐릭터에 대해 답답해했던 팬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며 솔직히 다시 읽어나가도 스즈와 쇼케이의 초반 행적은 보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왕, 세이슈, 라쿠슌은 상당히 캐릭터가 빛나는데 특히 세이슈의 죽음은 다시 봐도 『십이국기』 시리즈에서 슬픈 장면. 실제론 애니메이션 초반에서 요코의 답답한 행적도 이 둘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런데 이런 캐릭터들의 답보된 모습은 후반 성장에 대비해 놓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 끝까지 보고 나면 상당히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는 사실. 물론 이런 것도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복선과 개연성을 갖추어나갔기 때문에 와닿는 사실인데 종종 이런 점을 생략하고 잘 나가던 캐릭터의 변화를 갑작스럽게 그려내어 팬들의 기대를 떨어뜨리는 작품들도 많다는 게 생각나서 안타깝더군요.
새로 그려진 삽회의 이미지는 이번 시리즈에서도 섬세하고 화려한 편입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이번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편에서 요코의 이름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 ‘요시’라고 쓰이고 있고요. 구 번역본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세세한 부분들은 책을 읽지 않은 이상 세밀하게 기억하기 어려운 법인데 이번 상권에서도 꽤 흥미로운 부분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요코의 나라인 경동국이 원래 여왕 운이 없던 나라인지라 왕을 데려다준다는 서운을 타고 온 요코의 모습을 보고 관리들이 또 여왕이냐며 한탄을 하거나 요코 면전에서 회달(작중 태평성대였던 달왕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을 이야기한다거나 요코 입장에서 같은 여왕이란 이유로 같은 모질이 취급받는 것이 상당히 억울하고 스트레스받을 상황들이 이어지는데 거기다 문제점은 기린과의 신뢰 관계 역시 불안하다는 점입니다. 일단 요코는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 부모를 비롯 주위 사람들의 말에만 고분고분하고 자기주장 없는 어린 소녀의 입장에서 벗어나 홀로서기하는 등 인간적인 성장을 이루긴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 요코의 성장이지 왕으로써 온전히 각성했다 이것은 아니었던 걸로 보이거든요.
거기다 요코의 즉위식에 초대된 라쿠슌과 엔키 로쿠타의 대화에서처럼 요코는 케이키와 성격이 비슷하여 부딪히는 점도 있는 데다 기린 입장에선 두 번째 주인을 섬긴다면 첫 번째 주인이 실도 하였다 하더라도 그래도 서로 긴밀한 관계인지라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의식하지 않아도 왕들을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다 선대인 여왕도 여성, 현재 요코도 여성이라 차라리 요코가 남자인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언급까지 나옵니다. 특히 전대 여왕이 실도한 이유가 케이키를 남성으로 여겨서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의미심장해지죠. 기린과 왕의 관계가 군신만이 아니라 동반자적인 입장인 것을 생각한다면 기린과 왕의 성별이나 나이 대에 따라서 그 동반자적 성향도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기린이 왕보다 어리면 부모와 자식 같은 느낌을 주지만 외견 상 비슷한 나이 대이거나 성별이 다르거나 하면 또 그 성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암시되거든요. 아마 요코가 남성이었다면 이야기의 전개도 상당히 달라졌으려나요?
그리고 작 중에서 보면 요코가 돌아다니기 편하단 이유로 남장을 하고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야 여자인 줄 알아채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요. 작중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껄떡대는 남자들이 없지도 않은 걸 보면 여자로서도 괜찮은 이미지인 거 같으나 현재 그려지는 요코의 모습은 일본에서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던 소녀의 이미지였다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 애초에 일본에서 요코가 그렇게 된 것도 요코 부모의 시대착오적인 교육 때문인데 여자애는 무조건 얌전해야 한다, 여자애는 무조건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둥 요샌 참으로 씨알도 안 먹힐 교육방식임에도 아직도 이런 사고방식을 갖춘 인간들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도 놀랍더군요. 하여간 이런 부모의 성향 탓에 고분고분한 여자애로 자랐다가 『십이국기』 세계에서 죽을 고생을 하게 되고 겨우 홀로서기를 이뤘는데도 불구하고 요코에게 돌아온 것은 ‘여자는 안돼’라는 실망이 섞인 반응이었단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요코가 여성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남성 그것도 무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