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동양신화』 1권 리뷰
도서관에서 한국신화전설 관련 책을 찾다 보니, 전공서적류를 제외하면 그 수가 적을뿐더러 신화나 전설류를 분류해 놓은 코너에서도 상당수는 서양신화이기 때문에 더 빌려볼 만한 것들이 없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한국신화 책은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조현설 저/한겨레출판사]』나 『살아있는 우리 신화[신동흔 저/한겨레신문사]』 또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한국신화[최원오 저/여름언덕]』 등인데, 단순하게 신화의 내용만을 전달해 주는 책 보다 작가 나름의 해석이나 주석이 달린 책을 찾아보는 경향이 있어 책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었어요. 어릴 적에 동화나 민담/전설집을 통해 신화나 전설의 내용은 거의 알기 때문에 다시 내용을 복습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저자 나름의 해석이나 풀어쓴 설명이 더 재밌기도 하니까요.
어쨌거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대신 빌려온 책이 바로 『이야기 동양신화』입니다. 중국신화도 이미 예전에 다른 책들을 통해 많이 접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읽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책을 빌려온 까닭은 이 책에 실린 상당수의 삽화들이 눈을 끌었기 때문이에요.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은 고전 그림들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적으로 신화의 인물을 재해석한 그림도 몇몇 실려있는데 그런 점이 볼만했고요. 제가 빌려본 이야기 동양신화는 '중국신화'에 치중하고 있지만 이걸 단순히 지역적으로 해석해야 될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에 상당히 영향을 끼친 구전으로 봐야 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와와 염제 신농인데 여와는 중국신화의 창조여신이고 염제 신농은 농업과 의약의 신입니다.
중국신화 속의 신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중국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미친 영향력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바뀐 황제 신화보다 훨씬 크지요. 우리나라 고구려 벽화에도 소머리(牛頭)신 염제의 모습은 종종 등장한다고 합니다. 보면 신화라는 것은 어떻게 읽어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어느 나라의 신화든 재미가 있는데, 이 책에선 중국신화의 형태와 다른 외국의 신화와 비교도 하면서 내용에 흥미를 갖게 만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혼돈에서 태어난 거인 반고 신화는 북유럽 창조신화의 거인 이미르를 생각나게 하고 열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영웅 예가 후에 인간세상의 요괴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는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제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책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거인 반고의 창조신화는 우리 신화 속 세상을 창조한 거인 마고할미 신화와도 유사합니다. 다만 마고 할미는 후세에 지위가 격하되어 산신령 정도로만 머물게 되었다고요. 서로 떨어진 대륙에서 비슷한 형태의 신화가 등장하는 이유는 환경이 전혀 다르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사유나 사고는 비슷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신화의 형태도 비슷한 유형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합니다. 근데 신화도 신화 나름인지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있는 반면 좀 싱겁다 싶은 이야기도 존재하는데 혼돈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창조신화와 황제와 염제의 전쟁, 황제와 치우의 전쟁 이야기, 영웅 예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읽은 반면에 여신들의 사랑 이야기나 태평성대에 들어선 임금들의 이야기, 황화강의 치수 이야기 등은 재미가 반감되더군요. 이건 순전히 제 취향의 호불호에 달린 듯싶습니다만...
황제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후대에 그 지위와 의미가 변질되긴 했지만 치우는 염제와의 의리를 지킨 용맹스러운 신임은 분명하지요. 오히려 신화책을 읽다 보면 승리자인 황제보다 인간에게 큰 도움을 준 자비로운 신 염제가 황제에게 패하게 된 것이 더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 내용 말미에 신화를 넘어 좀 더 역사적인 색채를 띠는 은의 멸망과 주의 건국 이야기는 그것을 모티브로 한 『봉신연의』를 소설과 만화버전 둘 다로 읽은 기억이 있어 반갑기도 했습니다. 『봉신연의』는 제가 읽은 다른 소설들인 『삼국지연의』에 비교하면 더 판타지성이 짙고 『서유기』에 비하면 더 스케일이 큰 편이었는데 만화 같은 경우는 거의 이름만 따온 패러디에 가까운 작품이긴 했지만요. 이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부분을 읽다 보면 유사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전쟁이 치열함을 증명하는 '피가 강물이 되어 병장기가 떠다녔다'는 구절입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서도 이런 비유가 등장하는데요. 예전에 전공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이 시기의 기록을 분석하여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실제로 피는 공기에 닿으면 굳어지기 때문에 피가 강물이 되어 위에 무언가가 떠다닐 수 있는 일이 가능할 리 없으며 은나라와 주나라 전쟁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 말은 역사 속에서 타락한 은을 고결한 주가 멸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은을 지키고 따르려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 그리고 주나라의 침공에 맞선 그들의 방어전 역시 몹시 강력하고 치열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즉 전쟁에서의 이분법은 후대 승리자들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었죠. 이와 비슷하게 황제와 치우의 전쟁도 후대에 의해 치우 쪽이 상당히 격하된 경향이 있다고요.
그리고 『이야기 동양신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의 재미는 삽화들을 구경하는 데도 큰 편이었는데요. 역시 책에 삽화가 있으면 눈의 긴장도 한층 풀리는 편인 거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읽을 때는 삽화 있는 책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글만 빼곡하면 읽기가 부담스러운 경우가 좀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맘에 든 그림은 혼돈 '제강'의 그림인데 생김새가 동글동글한 게 귀엽게 생겼더군요. 이 녀석은 둥글둥글한 몸체에 날개랑 다리가 달리고 머리는 없어요. 창조신이 이렇게 귀여운 것도 처음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