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리뷰
아마 책 표지에 쓰인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아닌가 싶네요. ( "Globe, top hat and man's business suit against blue background." ) 이 유명한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건 처음인데 실은 초등학교 때였나 친구의 집에 굴러다녔던 포켓북 수준의 작은 번역서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나이가 어려서 깨알 같은 글자가 많은 책에 흥미를 못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애먹었거든요. 결국 제대로 읽지도 않고 손에서 놓고 말았습니다. 그때 굳이 책을 읽지 않았어도 TV에서 투명인간에 관한 게 여러 번 등장하는 걸 본 적이 있어 그 개념에 대해 얼핏 알고는 있었는데, 아마 『투명인간』을 다룬 영화의 개봉에 맞춰 모 프로그램에서 투명인간이 가능한가에 관한 주제의 내용을 방영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기를 사람의 각막까지 투명해진다면 투명인간 또한 다른 것들을 볼 수 없으므로 각막은 투명하지 않은 채 남아있어야 하며, 실제로 심해에서 사는 투명한 생물들도 각막은 불투명하게 남아있다는 내용이 주였어요. 고로, 소설 상에 등장하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 점에 대해선 이 책의 역자의 글에서도 언급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이 소설은 초능력이나 마법 같은 4차원스런 내용이 생뚱맞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과학자의 실험에 의해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서 그 실험이 행해지는 것으로 등장하여 내용이 억지스럽지 않게 전개됩니다.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과 『우주전쟁』과 같은 굵직한 걸작들을 창조해낸 작가로 과학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라고 역자의 글에서 설명이 되는데요. 거의 백여 년 전 소설들임에도 현재에도 재미있게 읽힐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투명인간과 타임머신은 계속 다른 작품들에서 재창작되어온 소재이기도 하니 그 여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요. 그럼에도 제가 이제야 처음으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편파적인 제 독서취향이라고 밖에 변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책의 내용은 아이핑이란 작은 마을에 수수께끼의 수상쩍은 이방인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실상 첫부분 마을사람들과 주인공인 그리핀이 엮이는 내용들은 좀 지루하기까지 했는데 조만간 사람들이 그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의 이상한 체질과 마을에서 일어난 도난사고 끝에 그가 투명인간이란 것이 발각되는 순간부터 내용에 박차를 가합니다. 경찰들을 피해 알몸으로 달아나던 그는 마블이라는 한 사내, 집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거의 묘사는 부랑아 흡사한 인물을 이용하여 필요한 물건과 자신이 놓고 온 연구기록물 등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마블이 연구기록을 들고 도망을 가게 되고, 경찰에게 쫓기던 그는 대학친구인 켐프의 집을 찾아가 그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고백하지요.
여기서 책을 읽으면서 제가 어느정도 가졌던 의문들이 해소되는데, 소설이라는 전제 하에 앞에 언급된 각막의 문제는 넘어가더라도 음식섭취와 상처를 입었을 경우 피가 흐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오더군요. 이미 그리핀의 내장은 투명상태이기 때문에 음식이 소화되기까진 뱃속에 음식의 잔재물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는다면 눈에 띄므로 식사 후에는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는데 이 말은 소설 상에 등장하지 않지만 소화하고 남은 뒤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들 역시 그대로 노출된다는 소리예요.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우는 혈액도 투명한 상태라 보이지 않지만 응고가 되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투명인간이라고 해도 몸에 진흙이 묻거나 물이 묻으면 형태가 드러나고 안개나 연기에 의해서도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건 그리핀이 담배를 피는 장면에서 증명되지요.
그리고 재미난 것은 그리핀이 쫓기게 되면서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알몸으로 돌아다녀야했는데 그것 때문에 추위와 피로에 쉽게 젖기도 합니다. 흔히 투명인간을 끌고 온 만화에서는 옷까지 투명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건 만화 특성상 알몸을 그리면 안 되고 소설보다 더한 과장이 허용되기도 하니 가능한 거겠지만요. 켐프는 투명인간이 발칵 뒤집어놓은 세상 소식을 실은 신문기사와 그리핀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위험을 알아챈 후 경찰과 협력하여 그를 잡아들이려 하는데 켐프의 배반에 분노한 그리핀이 그의 목숨을 노리면서 후반의 내용은 켐프를 노리는 그리핀의 추적과 또 그 그리핀을 쫓는 켐프와 경찰 일행의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결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리핀을 잡지만, 그리핀은 사람들이 투명인간을 잡기 위해 휘두른 무기와 린치 끝에 사망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요.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리핀의 연구기록물을 빼돌린 마블이 그것을 보면서 나름 야망을 불태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보면 소설의 최후승자는 마블이 아닌가 싶었는데 마블이 머리로 그리핀의 연구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리핀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법도 없지요. 처음 읽었을 때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투명인간은 매력적일지도 모르지만 중반부터 등장하는 그리핀의 고생 일대기를 읽노라면 별로 좋을 거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자의 글에 등장하는 인간의 고립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기본적인 의식주[주는 제외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조차 어렵다면 말이지요.
흔히 수치심이나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 한순간 투명인간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거나 농담으로 투명인간이 되면 엿보기가 쉽겠다는 둥 말하지만 그건 피상적인 상상 차원에서 얘기하는 것일 테고요. 현재는 투명인간이란 용어가 남들에게 잘 인식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잊히는 존재감이 약한 사람들을 일컫는 데 종종 쓰이는데, 그렇게 쓰이는 것 자체가 인간이 관계를 중요시하고 고립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소설 상에서의 그리핀의 파멸이 고립된 인간의 파멸을 그리는 것이라면 훨씬 전에 투명인간이라는 상상의 소재를 끌고 와서 그런 인간사회의 문제를 지적한 작가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