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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도서관 :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리뷰

0I사금 2025. 3. 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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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엔 흥미로운 작가의 소설들이 많아 재밌게 보고 있긴 하지만 모든 소설집이 그러하듯 모든 내용이 다 맘에 들거나 재미있어하는 건 아닙니다. 일단 도서관에 전권이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를 발견할 때마다 즐겁게 빌려오곤 합니다만 어떤 경우는 생각보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 책도 있었는데 최근에 빌려온 한 단편집이 그런 경향이 컸습니다. 모르는 작가의 소설들인 경우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인 셈이니 그다지 편견이나 기대를 갖지 않고 읽을 수 있어 독서를 할 때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번에 빌려온 소설 중 하나는 내용이 진짜 난해하다 싶어 결국 중반까지 겨우 읽어나가다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덮어버렸고 대신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온 이 『바벨의 도서관 :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단편집 역시 모르는 작가의 소설들이긴 합니다만 나름 맘에 드는 요소가 많았어요. 일단 단편의 숫자가 많아서 호감이 간 것도 있었는데 원래 장편소설보단 단편소설 쪽이 더 끌리는 점도 있으므로. 일단 작가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바가 없고 우연히라도 이런 이름을 가진 작가의 단편을 읽은 기억도 없더군요. 하지만 작가 해제를 본다면 서양의 환상문학에서 꽤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더군요.


첫번째 소설 「베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나 배우자를 잃은 고통에 대한 문학작품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단순 소설만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등지에서도 이런 슬픔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는 편인데 특이하게도 제가 본 소설들만 그런 건지 이것이 죽은 사람의 매장과 관련되는 경우도 종종 있더군요. 이 소설 「베라」는 아내를 잃은 남자의 고통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는 아내를 잃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아내를 죽지 않았다고 믿고 살아있다는 환상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지만 곧 그리움에 빠져 그를 쫓아갈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이 아내의 장례식날 슬픔을 못 이기고 던져버린 무덤의 열쇠를 집어드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일종의 열린 결말이긴 합니다만 결국 이 남자가 죽은 아내를 쫓아 아내의 무덤에서 잠들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애틋하다면 애틋하고 섬뜩하다면 섬뜩할 사랑을 그린 내용이었죠.


두번째 소설 「이자보 여왕」은 소설의 시대배경은 1404년 경으로 샤를 6세의 부인으로 프랑스를 섭정하던 이자보 여왕이 등장하는데, 이 이자보 여왕은 자신이 총애하던 조금 경박해 보이는 귀족 청년이 재무관의 순진한 딸을 빼앗으려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탕탕 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것도 이 여왕의 환심을 사려던 다른 귀족이 수를 써서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여왕의 귀에 들어가게 했던 것으로 치정과 권력이 영합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리고 여왕과 청년이 밀회를 나누는 사이 재무관의 집에 불이 납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딸을 납치하려고 불을 질렀단 누명을 쓰는데 이것이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진행되기보단 아예 처음부터 여왕의 계략이라는 게 드러나며 청년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면 여왕과 불륜을 맺었단 것을 밝혀야 된다는 것을 알고 결국 처형대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때 청년의 변호사는 무슨 치기가 들었는지 그를 살리기 위해 청년을 탈출시켜 변호사로 위장시키고 자신은 청년 대신 죽으려 하는데 귀족 청년은 국경을 넘기도 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변호사는 예정대로 귀족 대신 처형됩니다. 처음엔 무슨 치정소설인가 싶다가도 나름 제 딴에는 멋진 짓을 한다고 믿는 두 남자가 냉혹한 결말을 맞이하는지라 좀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놀라운 이야기였어요. 일종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느낌도 났고요. 근데 솔직히 결말 진짜 맘에 들더군요.


세번째 소설 「어느 슬픈 작가의 슬픈 이야기」는 제목이 무슨 루프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나갔습니다. 어느 파티에서 사람들은 파리를 떠들썩하게 한 결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 결투의 참관인인 유명한 연극감독이 그 실상을 털어놓습니다. 십 년 만에 한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던 그는 그가 결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고 어떤 이야기를 쓴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사정을 털어놓자 이런저런 지적을 하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실은 그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감독은 얼떨결에 그의 결투에 참관하게 되지요. 

 

결국 친구는 결투에서 죽게 되고 감독은 그의 죽음이 어느 연극보다 극적인 것을 알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그의 유려한 말솜씨는 파티에 나온 사람들까지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화자는 그 이야기를 글을 쓰는 친구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그 친구는 완벽한 이야기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한다는 이야기로 결국 누군가의 극적인 이야기는 좋은 작품의 소재거리가 된다는 허무한 이야기이려나요. 문득 이 이야기가 감독의 허언 아니냐 하다가 초반에 실제 있었다는 언급을 보고 참으로 별 생각이 다 드는 재미난 소설이었어요.


네번째 소설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은 바로 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제목을 장식하는 소설입니다. 분량도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긴 편이라 초반 진입에는 좀 지루했습니다. 왜냐면 화자가 친구와 호감 가는 여자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 그와 함께 파티에 가고 하는 이런 과정이 죽 늘어지기 때문인데 본격적으로 자신들과 얽힌 남자의 정체에 대해 밝혀지면서 내용이 흥미로워집니다. 화자는 그를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을 기억하는데 바로 처형장에서 그를 본 기억이 있으며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스스로도 자신을 사형집행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들은 그의 품위 있는 외관과 부유한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요. 하지만 대화를 엿들은 인물 중 의사인 친구는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그는 원래 유망한 귀족가의 후계자로 실제로 백만장자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동양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는 범죄자들의 처형장면을 자주 보게 되고 그것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내면의 잔혹함 혹은 정신병을 일깨워 그는 거액을 주고 사형집행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유럽에 와서도 마찬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지만 화자는 자신들이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그와 어울리던 '공범'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에게도 남모를 광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관대해지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덕에 호감이 오고 가던 여자와는 깨질 것 같은 암시를 주지만요. 앞의 지루함에 비해 후반의 반전이 꽤 놀라운 지라 인상적인 소설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소설 「체일라의 모험」은 중국 만주의 어떤 왕국을 배경으로 한 것 같은데 동양적이라는 비유가 소설 내에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그쪽으로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았나 싶더군요. 체일라라는 허풍선이 같은 남자가 지배자인 체탕왕에게 자신이 부처님을 만나 왕을 노리는 자들을 알아보는 능력을 주겠다고 허풍을 치며 그 대가로 공주와 왕족신분, 그리고 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으로 체탕왕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를 지하감옥에 가둡니다. 여기서 체일라는 그럴 싸한 말들을 늘어놓는데 왕도 여간내기가 아닌지라 그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걸이만을 풀어서 그에게 주고 감옥에서 내보내줍니다. 

 

체일라는 그것을 받고 매우 기뻐하는데 이 녀석이 사기꾼이라면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나는 게 있어요. 예전에 유명한 마피아를 상대로 투자금을 얻어 돈을 배로 벌어다주겠다고 약속한 뒤에 나중에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을 해서 나름 '진실성' 있는 모습을 어필하자 마피아 보스가 그런 모습에 넘어가 원래 약속한 돈보다 적지만 그에게 호감 표시로 돈을 건네주었고, 이 사기꾼이 노린 돈이 처음부터 그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실화였다고 하는데요. 이 체일라라는 주인공이 왠지 그 사기꾼을 생각나게 하지만 여기 또 다른 주인공인 체탕왕은 더 머리가 좋아서 오히려 체일라를 꿰뚫어 보고 굳이 죽일 필요는 없이 자비를 베풀었던 셈이죠.


여섯번째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은 한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한 죄로 종교재판소에서 끌려와 갇힙니다. 재판관은 그에게 회개를 강요하고, 그는 그것을 거부하는데 어느 날 독방의 문이 열린 것을 알고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와 마주친 사람들이 그를 의식하지 못하자 그는 혹시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닌지 의아해하며 출구를 향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의 계획으로 출구에는 바로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 분량이 짧아 별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 반전이랄지 하여간 놀랐는데 제목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소름 돋지요. 왠지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남은 게 '헛된 희망'이라는 해석을 본 기억도 나고요. 


마지막 소설 「어떤 내기」는 비슷하게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떤 젊은 사제에게 연모-이것이 불륜인지는 제대로 암시되는지 않고-를 품고 있는 마리엘은 파티에 초대된 기이한 사제 튀세르가 카드내기를 하면서 자신이 아는 종교적 비밀을 건 것을 알게 됩니다. 카드게임에 참가한 사람들과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흥미를 갖고 게임을 진행하고 결국 튀세르는 자신이 건 종교적 비밀을 말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그 비밀이란 '연옥이란 없다'는 것.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황당해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주석에 따르면 연옥은 영혼이 죄의 대가를 치르고 천국에 가기 위해 잠시 단련을 받는 상태라고 나오더군요. 결국 죄를 저지르면 답이 없다는 이야기인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하지만 마리엘은 결국 그의 말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랑'을 단념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앞서의 소설들보단 반전적인 매력은 없지만 와닿는 바는 큰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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