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권 리뷰입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는데 보통 이런 경우는 수렴청정을 하는 게 관례인지라 왕실의 주인으로 나서게 된 것은 바로 정순왕후입니다. (이제는 정순대비) 보통 정순왕후는 정조를 그린 사극에서 정조의 개혁정치에 반대를 하여 정조 사후 그 개혁정책들을 무효로 돌린 악의 축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히려 정순왕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이는 거 같아요. 그가 정조를 반대했던 벽파의 중심이 된 것은 척신 집안이었던 그의 출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폈던 정책의 일면에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계승하려는 측면이 보이며 철저하게 명분을 내세워 움직였다는 등 해석이 보입니다.
놀랍게도 이 정순대비의 수렴청정 시절에 궁에 속한 노비 6만여 명이 해방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신분제가 문란해져서 양민의 수가 상당수 줄어들어 폐단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런 해방책은 언젠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는 생각. 게다가 이 시기 천주교 박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당대에 이단으로 여겨졌던 천주교 신봉자가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많았다는 증거기 때문에 천주교를 어떻게 처리하기에 앞서 구조적인 문제를 손봐야 했지만 당대의 지배층은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초반 벽파와 시파의 싸움 끝에 결국 벽파가 몰락하고 시파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여기는 꽤나 지지부진하게 읽은 부분으로 이 싸움의 끝이 의미하는 것은 그동안 이어져온 당파의 종말이며 세도정치의 시작이었다고요.
그리고 순조시기에 달하면 조선전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참다못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는 등 서서히 뭔가 폭발할 거 같은 조짐이 보이는데 이 때 일어난 것이 바로 '홍경래의 난'입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반란이고 책에서도 지적하듯 당시 핍박받던 백성들이 평민이던 홍경래를 중심으로 모여 일으킨 그야말론 '민란'이었지만 이 반란 세력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경래의 난은 백성들의 의식이 전대와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었죠. 생각해 보면 이 홍경래의 난은 여러모로 특수한 요소를 지닌 사건임에도 후대의 창작에는 등장하는 경우가 많이 못 본 거 같아요. 그나런데 제가 읽은 소설 중 김삿갓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초반부에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게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실패한 반란이기에 대리만족을 원하는 시청자들 입장에서 즐겨볼 수 없어서 사극과 같은 드라마로는 만들기 어려운 건지도 모르지만. 다만 사건 자체는 인지도가 높은 거 같은데 이것은 워낙 순조가 뭔가 내세울 만한 왕이 아니었기 때문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 중반에 순조가 정치에 손을 놓음으로 오히려 백성들을 죽인 왕이다 비슷한 언급이 나오는데 독재자도 문제지만 무능한 지도자도 백성들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건 똑같은 듯. 이 시기 정작 백성들을 돌봐야 할 순조는 혼탁한 정치싸움에 질려버린 나머지 업무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전대 왕들이 당파의 눈치를 봐가며 그 세력들을 제대로 조율해야 했다면 이 시기의 순조는 세도가의 눈치를 살펴야 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완벽했던 아버지에 비하면 순조는 그 능력도 비전도 모자라고 다만 그 아들 효명세자가 부각되는데 흔히 기대를 모으는 사람에게 흔히 찾아오는 요절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를 끝으로 조선왕실의 추는 이미 기울어진 걸지도 몰라요. 순조시대하면 세도정치시대고 흔히 세도정치를 연 인물로 김조순에게 과녁이 돌아가는데 놀랍게도 김조순 자체는 청렴하고 나서지 안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행동거지로 보나 뭘로 보나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이지만 어쨌거나 막후에서 모든 걸 조종한 인물이라고 할까요? 그의 죽음으로 세도정치의 폐단은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왕실은 세도가가 꽉 잡고 있는 데다가 사회적으로 수령들의 탐학과 부패로 백성들의 삶은 죽어가고 있는 와중에 영국의 이양선까지 등장함으로 조선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영국과 교류를 거부하고 그들에게 원조만 하고 돌려보내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원하든 원치않든 조선은 변화의 기류에 놓이게 되었는데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다들 아는 이야기라서 이제 권수가 다 되어 갈수록 재밌기보단 암울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 권에서 밝혀지지만 참으로 한숨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참고로 정약용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분명 정조대에 활약한 인물이지만 정조실록보다 이 순조실록에서 얼굴을 많이 비춥니다. 천주교 박해 당시 형들이 처형당하고 본인은 유배당한 것도 있으려니와 그의 학문적 성과가 대단하단 점도 빼놓을 수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배당한 뒤 다시 불러들일 뻔한 것은 효명세자와 순조가 위독할 무렵 정약용의 의술이 대단하단 이야기에 불러들인 것이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두 부자는 눈을 감으므로 결국 정약용이 다시 쓰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왠지 인기가 많은 인물이라 모 채널에서 수사관으로 활약하는 드라마도 나왔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여러모로 시대가 묻어버린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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