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도서관에 갔더니 새로 들어온 책 중 비슷한 디자인의 양장 서적이 두 권 세트처럼 놓여있는 게 보였습니다. 책의 제목도 다름 아니라 『안데르센 동화집』과 『그림 형제 동화집』으로 동화책이긴 하지만 원래 이 두 가지는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 책의 디자인도 맘에 들어서 두 권 다 같이 빌려왔습니다. 책 디자인을 여러모로 살펴보니 일단 책이 작고 깔끔한 양장에다 삽화도 많이 들어 있고 마치 소장을 하고 싶게 생긴 책이었어요. 거기다 동화책이긴 합니다만 제가 어릴 적에 읽었던 그림책들과는 달리 활자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어른들 대상으로 나왔을 법한 느낌이 들었던 책입니다. 그리고 책을 완독하고 난 뒤에도 느낀 것이 안데르센 동화들은 단순 해피엔딩 위주의 동화라기보단 어른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는 환상소설이나 현대판 잔혹동화와 유사한 느낌도 들었는데 실제로 안데르센 동화들은 슬픈 결말로 끝나는 것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대표작인 성냥팔이 소녀나 인어 공주 같은 것들요.
책은 본문에 들어가기 이전에 작가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그의 이야기의 삽화를 그린 삽화가들 다섯 명에 대한 소개도 실려있습니다. 보면 삽화들이 상당히 퀄리티가 좋아서 이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될 정도. 실려있는 동화들은 순서대로 '눈의 여왕'과 '그림자', '인어 공주', '성냥팔이 소녀', '어머니 이야기', '발데마르 다에와 그의 딸들에 대해서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백조 왕자', '아름다워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중 처음 접해보는 안데르센의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익숙한 동화들 역시 어린 시절엔 모르고 지나갔던 부분들이나 아니면 유아 대상 어린이 동화책으로 나오는 바람에 축약되거나 생략된 부분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읽을 수 있었고요. 특히 '눈의 여왕' 같은 경우는 눈의 여왕의 존재가 악한 것이라기보단 소년인 카이와 어느 정도 교감을 하는 자연적인 존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고 악마의 거울 파편이 눈에 들어가 변해버린 카이는 그 심성이 변했다기보단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성장통을 겪는 모습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소녀 겔다는 카이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할머니에 대한 걱정도 잊지 않는 가족적인 성격으로 카이에 대한 그것도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단 가족애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겔다를 도와주는 조력자들은 대개 지혜로운 요술쟁이 노파나 산적의 딸 등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이 많은데 특히 안데르센 동화들에는 주인공들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역할로 나이 많은 여성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이점입니다. 백조 왕자에서도 공주를 도와주는 것이 노파로 변장한 숲의 요정이고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할머니인데 아마 유럽 구전에서 요정들이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거나 하는 내용이 많아 그에 영향을 받은 걸까요? 아니면 안데르센의 어머니의 애정을 많이 받아 그것이 반영된 덕일까요? 눈의 여왕이 두 소년 소녀의 성장담이라면 두 번째 작품인 그림자는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데 인간의 약점을 잡고 공포를 안겨 준 그림자는 팔자가 피고 인간의 선함을 보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선량한 학자는 죽음을 맞는 결말이 읽다가 충격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동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
이런 점은 '발데마르 다에와 그의 딸들에 대해서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비슷한 게 발데마르 다에의 황금기와 몰락에 관한 이야기는 인생무상을 느낄 정도로 씁쓸함을 안겨주거든요.
안데르센의 대표작인 인어 공주는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인어 공주의 행동이 다시 읽으니 답답하기까지 했어요. 가족을 버리고 목소리까지 잃으면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왕자는 다른 여자한테 갔으니... 하지만 그 세계관을 이루는 불멸의 영혼 설정이 눈에 띄었는데 인어는 영혼이 없어 300년의 긴 수명이 끝나면 바다에 흡수되지만 인간은 죽고 나서도 영혼이 있어 영원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마치 인간의 윤회관이나 낙원 신앙을 느끼게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에서 원래 물거품이 되어야 할 인어 공주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면 언젠가 영혼을 얻게 되는 공기의 요정이 되어 왕자 커플을 축복해주고 떠나는 유명한 결말을 맞는데 인어 공주 자체가 이루지 못한 안데르센의 사랑 이야기가 반영되었다는 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삶을 얻어 떠나는 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격정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라 봐도 무방할 정도. 이는 마지막 소설 '아름다워라'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아름다운 여성에게 반해 결혼하고 그녀를 먼저 보낸 조각가가 후에 아름답진 않지만 현명한 여인과 만나 결합하는 것도 그렇고요.
여기 실린 작품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바로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신에게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바쳐서 죽음의 신을 찾아가 아이를 되찾아오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군데서 인용이 된 것을 익히 본 적이 있었는데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원전이라거나 그 자세한 내용은 여태까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비극적인데 자신의 눈까지 주면서 아이를 되찾으려고 한 어머니는 아이의 운명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축복받은 인생과 재앙이 가득한 인생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중 하나를 선택해도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이야기를 죽음의 신으로부터 듣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차마 선택을 하지 못하고 어머니는 아이의 운명을 도로 신의 뜻에 맡기고 죽음의 신은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라 상당히 충격적으로 어머니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가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실린 이야기 중 가장 가슴 아픈 내용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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