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이지메의 시간』은 예전에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했던 소설집입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한국에서도 나름 인지도 있을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소설이 끼어있기 때문에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르는데 특이하게도 책을 발견했을 땐 제목의 찜찜함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대출해갈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도서관에서 읽어버린 책입니다. 종종 우울한 내용의 영화나 소설을 찾아다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리뷰를 쓰게 되었는데요. 어쩌면 책을 발견했을 당시 책을 빌려가지 않은 이유는 이런 내용의 책이 웬만한 공포소설보다 무섭고 찜찜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미리의 단편을 포함하여 총 여섯 개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는데 제목답게도 왕따와 이지메를 중점으로 다루는 내용들인 데다가 친구애와 주위의 관심 따위로 그 왕따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집단 괴롭힘의 현장 그 자체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들이라서 그럴까요?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왕따와 학교폭력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과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가끔 확인할 수 있는데 보다 보면 어이가 없는 일도 있는 것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왕따-집단 따돌림 현상이 생겨났다는 주장이 더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헛소리냐면 제가 어린 시절, 이지메라는 일본 쪽 단어를 사람들이 모르던 시절 그러니까 왕따라는 신조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무렵에도 아이들 사이에선 버젓이 약한 애를 괴롭히고 그룹을 지어서 리더 격인 아이들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애를 따돌리고 모욕 주는 일은 으레 있었거든요. 지금이 매체가 발달해서 학교 같은 폐쇄적인 곳의 실체가 까발려졌을 뿐, 여럿이서 하나를 짓밟고 모욕 주는 일은 옛날부터 있어왔다는 겁니다.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산골과 같은 폐쇄적인 곳에서 일어나는 가장 만만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착취나 성폭행범죄, 한때 방송을 탔던 섬노예와 같은 사건들도 따지고 보면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이 이제야 두각을 드러냈을 뿐인 것처럼요. 이건 거의 인간의 본능 수준이라고 할까, 마치 우리나라는 언제나 안전지대/청정지대였던 것처럼 생각하며 나쁜 것은 무조건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착각을 보면 웃음도 안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접한 순간 빌려가기 싫을 정도로 찜찜함을 느꼈었는데 당시 제가 처한 상황이 우울하기 때문인지 갑작스레 생각났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이런 책은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책에 실린 단편 중에선 이지메 현상 자체를 극복하는 케이스는 없고 오히려 등장인물이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케이스가 많은데 책 자체가 사람들의 환상을 깨부수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더 맘에 드는 것도 있었어요. 뭐랄까, 사회의 암울한 부분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꼭 신파조로 억지 화해시키는 내용의 창작물들이 많아서 불만이었기 때문에 이 책이 다시금 떠오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 실린 소설들은 단순 이지메 피해자 중심이 아니라 몇 개의 소설은 특이한 시점을 취한 경우가 있는데 표지에 실린 유미리의 단편 소설은 피해자-가해자-방관자인 교사의 시점을 두루 취하면서 얼마나 인간들이 무력한 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심지어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요. 또 한 소설은 방관자+가해자였던 주인공이 왕따와 직접 대면을 통해 어느 정도 피해자와 동질성을 느끼며 피해자가 안으로 움츠러들게 만든 원흉은 피해자의 강압적인 어머니 탓이고, 그를 자기 누나의 인생에 간섭하여 누나의 인생을 망친 제멋대로인 자기 어머니와 겹쳐보면서 끝내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마는 파국을 맞이하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어떤 이야기도 극복이니 화해니 같은 판타지를 보여주진 않는데 현실도 이런 잔인한 결말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습니다. 만약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더 많은 느낀 바와 나름의 교훈을 늘려 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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