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소설과 만화

『분노의 포도』 리뷰

by 0I사금 2025. 4. 23.
반응형

제가 처음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접한 것은 금성출판사 청소년 문고판의 『붉은 망아지』라는 소설집이 최초인데, 청소년문고판은 으레 소설의 해설이나 작가에 대해서 부록에 자세하게 실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붉은 망아지』는 한 농장의 소년이 원하는 망아지를 얻으면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인데, 그 소설의 서정성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중편 정도이고 뒤에 실린 단편들은 어딘가 어둡고 쓸쓸한 내용이었는데, 한 중년여인이 한순간 꽃을 매개로 가지게 된 사랑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이야기라던가, 한 원주민 혈통의 청년이 술집에서 그만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고 가족과 헤어져 쫓기다가 끝내 사살당하는 이야기라거나... 뒤에 실린 작가의 작품 세계나 최근 읽게 된 존 스타인벡의 작품들을 보아도 어쩌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크고 작은 비극이 이 작가의 작품세계 아닐런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포도』보다 먼저 접하게 된 『생쥐와 인간』은 『분노의 포도』처럼 대공황시기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떠돌이 노동자 두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한 명은 약삭빠르고 체구가 작은 조지이고, 다른 하나는 거구에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지체에 가까울 정도로 천진난만한 청년인 레니인데 이 레니의 그 독특한 캐릭터성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분노의 포도』를 읽으려고 했지만 당시 눈에 띄는 책은 민음사버전의 상하권으로 출간된 책이었고 한 권의 두께가 거의 일반소설 두 권씩에 해당하는지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기에 『생쥐와 인간』을 대신 빌려온 셈인데, 읽고 나서 나름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이 소설은 상당한 비극으로 끝나기 때문이거든요. 나름 농장을 차릴 꿈에 부풀어 일을 얻지만 결국 레니는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고-의도한 것이 아니라 레니가 자신의 힘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인식못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쫓기다가 친구인 조지가 쏜 총에 죽는 걸로 끝나는데 이 소설의 이런 결말 때문에 이 책은 나름 몰입하면서 읽고 나서도 리뷰를 쓰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문제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비로소 읽을 기회가 되었는데요. 일단 두께의 문제도 있고, 나눠서 리뷰하는 것도 뭣하기에 한 권으로 되어있는 홍신문화사의 책을 빌려왔는데요.

 

민음사 쪽 책과 상당한 분량 차이가 있는 걸로 봐서 축약버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딱히 뭔가 빠진다 하는 느낌 없이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나중에 민음사 버전과 비교해 보니 축약 버전이 아니라 민음사 버전이 좀 더 여유롭게 페이지를 구성한 덕에 2권이 된 듯.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이라는 이 작품에 대해 나름 인터넷으로 내용을 찾아보았기 때문에 이 책은 위의 『생쥐와 인간』보다 더 답답하고 비극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미리미리 염두에 두었습니다. 내용의 줄거리는 요약하면 경제대공황시기, 오클라흐마에서 살던 조드 일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작농들은 기계화에 밀려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광고지를 통해 캘리포니아에서 일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고 고물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그곳으로 향하는 내용입니다. 그 와중에 만취한 취객과 싸움이 붙어 살인을 저지른 조드일가의 차남인 톰 조드가 가석방되어 돌아오고 전도사일을 그만둔 전직 목사 짐 케이시도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여행은 결코 순탄치 않아서 차는 쉽게 고장 나고, 식량과 물건은 구하기 어려워지고 연세가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캘리포니아에 들어서기도 전에 객사하고 맙니다. 


그 와중에 만나게 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을 통해 광고지의 이야기가 실은 거짓이며 대지주들과 경찰이 손을 잡아 일거리를 찾아온 이주자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오키'라는 비하적인 명칭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조드 일가는 그대로 캘리포니아로 향합니다. 중도에 만난 윌슨 부부는 아내의 병이 악화되어 헤어지게 되고 정신지체아였던 장남 노아는 강가에 머물며 살겠다며 가족을 떠나버립니다. 거기다 톰의 여동생 로저샨의 남편 코니 역시 임신한 부인을 놔두고 도망을 가버리지요. 그리고 목사인 짐 케이시는 톰 조드가 보안관과 싸움이 붙자 그 대신 누명을 쓰고 잡혀가고 과거 부인의 죽음 탓에 끊임없이 죄의식 속에 살아온 백부인 존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겨우 캘리포니아로 들어선 그들은 가까스로 노동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국영캠프에 정착하여 그나마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일거리는 여전히 구할 수 없고, 그들을 빨갱이로 규정한 경찰들에 의해 갈등을 빚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조드 일가는 일거리를 주겠다는 복숭아 농장으로 향하는데, 복숭아 농장은 최저의 임금으로 사람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버는 돈으로 한끼 식사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움에도 조드 일가는 달리 떠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그곳에 남게 되는데, 우연히 산책을 나선 톰 조드는 자신 대신 잡혀갔던 목사 짐 케이시와 재회하게 됩니다. 짐 케이시는 톰 조드에게 앞으로 임금은 더 깎여나갈 것이라며 자신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파업 동맹을 맺었음을 알려주고, 결국 노동자들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하지만 짐 케이시는 톰 조드가 보는 앞에서 자경단 손에 맞아죽게 되고, 톰 조드는 그를 죽인 자경단을 홧김에 살해하게 되지요. 톰 조드의 살인으로 더 이상 복숭아 농장에 머물 수 없게 된 조드 일가는 목화밭 농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톰 조드는 숲 속에서 숨어 살게 되는데, 여동생 루디의 말실수로 톰이 숨어있다는 게 드러나자 톰은 어머니에게 자신은 앞으로 다른 사람들과 단결하며 싸울 것이라는 결심을 알리고 가족을 떠납니다. 얼마 뒤 홍수가 일어나 조드 일가의 거처가 물에 잠기고 로저샨은 그 와중에 아이를 사산하는데, 홍수를 피해 헛간으로 자리를 피한 조드일가는 그 헛간에서 굶어 죽어가는 남자와 그의 아들을 발견합니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로저샨은 죽어가는 남자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고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기나긴 이야기의 막이 내립니다.


『분노의 포도』는 『생쥐와 인간』 못지 않게 비극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가 살아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은 소설입니다. 찾아보니 소설의 제목 '분노의 포도'는 본디 성경에 등장하는 말로 하느님의 분노를 비유한다고 하는데, 여기에선 농작물 수확을 위해 노력하면서 결국 그 농작물을 얻을 수 없는 농민들의 비참한 심정을 드러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포도의 뭉쳐 있는 모습이 민중들이 한데 모여 있는 모습과 같다고도 하는데, 『분노의 포도』의 포도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난 소작농들의 무리와 절박한 심정이 되어서도 뭉쳐 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소설은 조드 일가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중간중간에 일반적인 이주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장에 조드 일가의 긴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다음장에 조드 일가만이 아닌 일반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이 짤막하게 묘사되는 형식이에요. 토지를 중심으로 인디언들과 전쟁을 벌이던 인간들이 다시 이제는 지주와 노동자로 갈리고, 먼저 정착한 토착민들과 새로 이주한 '오키'들로 갈려서 인디언들과 싸웠을 때처럼 다시 전쟁을 벌이고 서로에게 인종차별과 같은 편견을 부과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역사가 반복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들먹이며 인디언들 정확하게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편견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묘하게도 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인디언들의 신앙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초반에 등장했던 톰 조드의 친구인 뮬리는 집을 빼앗기고 가족들이 전부 캘리포니아로 떠나 혼자가 되었으면서도 이 땅을 떠나선 안된다는 신념으로 고향땅에 남기도하고, 짐 케이시는 톰 조드의 조부는 그 땅을 떠난 순간 이미 죽어있었다는 말로 그 영혼이 땅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후반 톰 조드가 짐 케이시를 통해 얻게 된 깨달음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닌 거대한 영혼의 일부이며 어디에나 이어져있다는 이야기도 왠지 인디언들의 신앙관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짐 케이시의 이런 가르침은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 연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셈인데 짐 케이시의 이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며, 마지막에 내내 철없는 모습을 보였던 로저샨이 아이를 잃었음에도 다른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젖을 먹이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딴소리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각각 변화를 겪는 가운데 톰 동생들인 루디나 왼필드 이 녀석들은 끝까지 철딱서니가 없더군요. 암만 나이가 어리다지만...


『분노의 포도』의 리뷰나 해석들을 찾아보면서 알게 된 글이지만, 주요 인물인 '짐 케이시'의 철자 앞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철자의 앞부분과 일치한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주축은 톰 조드이지만 소설의 주제의식을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는 인물은 짐 케이시입니다. 이미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전부터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말을 한번씩 하기도 하는데, 스스로 신을 저버렸다 하지만 짐 케이시 자체에 신이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족의 죽음이나 이별을 겪고 고달픈 생활에 무기력하거나 신경질적이 되어가기도 하지만 조드 일가는 끝까지 막장상황으로 떨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톰 조드의 어머니가 가족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잘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더군요. 또 특이하게 존 스타인벡 소설의 몇 개를 읽으면서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소설 속에서 쫓기는 살인자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악의를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게 되는 인물들이 제가 읽은 존 스타인벡 소설 세 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더군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