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한국신화나 설화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일단 당시 한국 설화에 대한 흥미가 약간 꺾인 것도 있고 이런 이야기들을 단순 모음집이 아니라 나름의 해석을 갖춘 것을 찾고 있기 때문에 책을 고르기 어려운 탓도 있었습니다. 보통은 단순 모음집 형식처럼 이야기만 실어놓는 경우가 많거나 학술용으로 나온 책들이라 읽기가 버거운 경우가 있는 탓도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흥미 위주로 이 책을 빌려왔는데 하필이면 이 책을 빌려올 시기에 같이 빌려온 책들이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서 읽고 감상을 쓰는 것이 한참 미뤄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 책을 다 읽게 되니 앞의 책들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와닿는 구석이 많고, 감동적인 요소도 많은데다 저자의 설화 해석도 매우 흥미진진하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의 원전이 알려진 것과는 다른 구석도 있어서 매우 신기했다고 할까요? 다름이 아니라 흔히 알려진 신화와 설화만으로도 힐링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새로운 책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읽은 책들이 매우 섬뜩한 내용을 담은 것들도 있어 더욱 그러하게 느낀 건지도 모르고요.
책에 실린 설화 중 제가 좋아하는 설화들은 아기장수 설화와 장자못 설화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소위 공포소설의 코즈믹 호러(인간이 손을 쓸 수 없는 우주적 공포)의 파편들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세상을 구하려고 왔지만 자신이 구할 대상-민중과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는 아기 장수와 덕을 베풀었지만 금기를 어긴 댓가로 돌이 되어버린 장자의 며느리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아뜩한 운명을 느끼게 하여 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안타까움과 슬픔, 무기력함이 같이 느껴지지요. 하지만 저자는 우리 설화는 반드시 운명론적 요소를 강화하지만 않으며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어요.
아기장수 설화는 자기보신을 위해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인간들의 나약함을 탓하면서도 언젠가 아기장수가 돌아온다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말미에 남겨져 있으며, 장자못 설화의 며느리는 신의 세상을 엿본 대가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런 장자와 달리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호기심과 미련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결국 과거에 얽매이는 인간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믿고 나아가라는 이야기인데 설화 속의 주인공들은 대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요.
과거에 얽매인다는 이야기로 대표적인 것을 책은 바로 선녀와 나뭇꾼/우렁각시를 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우리가 흔히 아는 해피엔딩과는 매우 다른데 다른 책에서 주워듣기를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는 원래는 동북아 유목민들의 건국신화였다가 우리나라에 그 요소가 전해지면서 건국신화의 입지를 잃고 동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약탈혼의 여지가 남아있는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를 구연한 대상들은 대개 여성이라고 하는데, 흔히 남성의 대리만족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욕망의 초점을 바꿔본다면 이 이야기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날개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녀는 무력하고 원치 않던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성의 자아로 비춰질 수 있다고요.
어쩌면 전근대 시절 여성의 주장이나 의지가 무시된 상황을 선녀에 투영시킨 것일수도 있겠지요. 반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뭇꾼은 선택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과거에 얽매임으로 독립의 기회를 놓치고 수탉이 되는 비극을 맞이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이런 자식에서 하나의 부모로 독립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설화도 우리 설화에 많이 등장하는 편입니다. 동시에 시대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찾아보면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요. 특히 이야기 속에서 다뤄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중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순종적인 조선시대 여인상과는 사뭇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제법 설명이 됩니다.
앞서의 선녀와 나뭇꾼의 설화가 감정이입의 초점을 바꾸어 여성들의 억압된 삶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풀이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는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아주 주체적인 여성상을 다루기도 하는데요.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현대의 시점으로 봐도 굉장히 놀랍고 당당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야기 속 여성은 혼례를 올리는 첫날 신랑이 급사하여 생과부가 될 일이 생기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면서 사람들에게 이 결혼식을 책임질 필요가 있다며 새로운 신랑을 데리고 오라고 버팁니다.
처음 여성의 행동에 당황하고 화를 내던 사람들도 서서히 그녀의 입장에 동조하고 결국 급사한 신랑과 비슷한 나잇대의 청년을 데리고 와서 대신 혼례를 올리게 하는데 결국 이렇게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함으로써 그 여성은 과부신세도 면하고 후에 아들을 장군으로 키우게 되었다는 게 이야기의 결말. 그런데 여기 책에 실린 청자들의 입장도 재미있는 것이 아들이 장군감이 아니라 그 여성이야말로 진짜 장군감이라고 감탄했다는 건데, 우리 설화가 운명에 맞선 순응하지 않는 인간상 더 나아가선 운명을 개척하는 인간상을 긍정적으로 여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여성은 현대에서도 높이 평가될 만한 자기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엮는 적극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높이 살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설화가 항상 이렇게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긍정적인 인간상만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팔자를 자신이 꼰다고도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간들의 군상을 다양하게 담아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또 하나의 이야기 우렁각시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그 주인공이 매우 찌질하고 못났다는 게 드러나지요. 주인공 청년은 우렁각시가 시집와줬지만 각시가 너무 예뻐서 밖에 못나가게 억압하고 새참도 늙은 자기 어머니로 하여금 짊어지게 할 정도로 한심한 청년입니다. 몸이 안좋은 시어머니 대신 각시가 새참을 지고 가다 원님의 눈에 드는 바람에 원님에게 끌려가고 청년은 각시를 뺏긴 게 어머니 탓이라며 여자를 찾아올 생각은 못하고 그저 원망하며 울다가 죽어서 새가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실제 모습.
동화로 알려진 것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는데 대개 구연되는 이야기 속 후일담에서 새로 태어난 청년이 각시를 찾아가 이 모든 게 엄마탓이라고 또 남탓을 하다가 원님한테 맞아죽는 결말이라고 합니다. 죽어서도 남탓이나 하면서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인간의 말로라고 할까요. 보면 인간의 성장에 관련된 이야기가 이 책에 많이 실려있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 외에도 동화 햇님과 달님의 호랑이는 다른 존재가 아닌 어찌 보면 자식에 대한 애증을 보여주는 부모의 자화상이며 동시에 해와 달이 되는 오누이는 홀로 서기에 성공하는 자식들의 모습일 수 있다고요.
그리고 책에서 강조하는 이야기의 또다른 주제는 바로 생명에 대한 연민입니다. 대표적인 설화로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삼십년을 헤맨 여자에게 드디어 복수를 할 기회가 찾아오지만 그 남자의 아내가 자기 남편이 버린 여자가 가엾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서 남편과 함께 늘 제사를 지내준 것에 원한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리고 동화로 많이 알려진 효자 호랑이 이야기도 그러한데 호랑이는 사회에서 외면당한 거칠고 두려운 존재를 상징하지만 그것을 인간적인 가족애로 받아들여주면서 호랑이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호랑이를 속인 나뭇꾼 역시 호랑이의 효심에 진정 감복하게 되는 인간적인 승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요.
이 연민의 감정, 남에게 덕을 베푸는 마음가짐이 복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도 책에 많이 실려있는데 자신도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의 곤란을 두고 보지 못해 그들을 구해주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선에 대한 지향성과 일종의 대리만족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곤란하거나 불행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진 존재가 어딘가에 있으며 또 그렇게 살길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해요. 이렇게 이 책은 설화의 이야기로 읽는 이에게 힐링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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