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요정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예전에 얼핏 찾아본 아일랜드 요정 관련 설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번 책을 꺼내 뒤적여봤더니 예상대로 아일랜드 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요정 설화나 민담들을 모아놓은 설화집 같더군요. 그래서 처음엔 책을 빌려올 때 일반 이야기책처럼 구전설화들을 소설 형식으로 모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자체도 요정 이야기니까 어딘가 아기자기하고 동화 같은 내용을 기대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참으로 의외라고 느껴졌던 부분들이 많더라고요. 이 책의 제목은 일단 『요정을 믿지 않는 어른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이런 책 제목 때문에 요정 설화들을 소설처럼 엮은 이야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지만) 책의 본편에 들어가기 앞서 '일러두기' 부분에 책의 내용들은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W. B 예이츠(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편집한 『아일랜드 농민의 요정담과 민담(1888)』과 『아일랜드 요정 이야기(1892)』 두 책에 실린 이야기 중 요정 이야기를 따로 모은 것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예이츠가 어째서 아일랜드의 구전 설화와 요정 이야기를 모았는지 그 배경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오는데, 예이츠는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로 지내면서 아일랜드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써, 어린 시절 자신이 보고 들은 켈트족의 영웅담과 요정 이야기 들을 모으기로 했다고요. 이것은 제가 예전에 찾아본 독일의 그림 형제가 독일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고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도로 독일 각 지역에 흩어진 민담을 한데 모았다는 것처럼, 그 배경은 달랐지만 목적의식은 묘하게도 유사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형제가 독일 민담을 각계각층의 사람들, 노인이나 여성, 농민들이라 할지라도 차별없이 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을 한 것처럼 이 책에 실린 요정 이야기의 상당수도 예이츠가 직접 만난 농민, 노인, 여성들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는 수집한 이야기를 소설처럼 가공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하나의 공포 환상소설처럼 읽히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이야기들은 마치 그들이 옆에서 들려준 것을 기록한 것 같단 느낌을 주는 것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흔히 아는 전래동화처럼 요정 덕에 신기한 일을 겪는 이야기나 요정의 못된 장난을 물리치고 큰 행운을 거머쥐는 이야기들도 있어 이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한 반면 어떤 이야기 중 본인이 직접 겪었다 싶은 요정 경험담은 당사자가 술을 너무 마셨다거나 아니면 당시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뭔가 착각을 했다 싶은 느낌이 나는 이야기도 더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이야기의 출처가 이런 식으로 확실하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책이 나온 시기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옛 이야기를 수집하여 참신한 해석을 얹어준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의 아일랜드 버전을 읽는 느낌이 났다고 할까요?
재미있는 점은 책에 기록된 당시 아일랜드인들의 요정에 대한 신앙입니다. 어떤 이들은 진짜 요정이 장난을 치거나 주위에서 논다고 믿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유령은 믿지 않아도 요정은 믿는다는 재미있는 믿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에 전해지는 요정들은 원래는 아일랜드의 토착 자연 신앙에서 비롯된 존재들이긴 하겠지만 후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의 여파 때문인지 그들을 죄를 많이 지었지만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 지상으로 쫓겨난 타락 천사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종종 설화 중에는 신부와 같은 존재를 무서워하거나 기도문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등 일종의 악마처럼 묘사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후대에 들어왔을 기독교 신앙이 본래 아일랜드에 존재했을 요정 신앙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다른 책 『켈트 신화 사전』에서도 설명되는 바이지만 아일랜드의 토착 신앙과 후대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 사이에서 큰 분쟁은 없었고 오히려 후에 들어온 기독교 신앙이 아일랜드의 토착 신앙을 포용하는 형태로 가면서 그 지역의 요정 신앙이 잘 보존되었다고 하는 등 역사 속에서 드물게 공존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요정들의 정체는 악의는 없지만 죄를 짓기도 하며, 가끔 잔인한 구석도 보이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면서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기도 하고 못된 인간들을 혼내주거나 참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사람들에게 행운을 전해주기도 하는 등 신화학의 용어로 '트릭스터(* 참고)'적인 면모를 강하게 띄는 존재들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정들의 모습은 왠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도깨비 설화와도 유사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이는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이나 두려움 혹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을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책을 본다면 대기근이라는 무시무시한 여파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의 요정 신앙 자체가 많이 사그라들었다고 하는 설명을 본 기억이 있는데 종종 예이츠의 기록에서도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파편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일구어진 믿음 자체는 시간이 지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라 볼 수 있겠습니다.
책의 구성은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을 법한 요정에 얽힌 이야기에서부터 종종 농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렸을 법한 노래와 시들이 실려있기도 합니다. 요정에 관련된 이야기나 노래를 통해서 요정들의 존재를 당시 농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파악할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장난기 많은 존재처럼 보이는 요정들이지만 실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공포심이 있어 그들을 부를 때에는 '작은 사람들'이나 '신사'라고 불러야 된다고 믿으며, 아기들이 못생긴 요정 아기로 바꿔치기 당하는 체인질링이나 요정의 속박이라 불리며 요정에게 납치당하는 처녀 이야기, 혹은 요정들이 예쁜 처녀를 신부로 점찍어 납치해가는 이야기(그리고 용감한 인간 청년이 그 처녀를 구해내는 이야기) 등을 볼 때에는 과거 일어난 기이한 실종이나 납치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런 해석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재해에 의한 사고나 사람에 의해 벌어진 사건들도 사람이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경우 귀신이나 신의 소행으로 돌린 것처럼 아일랜드 사람들도 비슷한 해석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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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제가 빌려온 책은 아쉽게도 인쇄 오류가 약간 있었습니다. 맨 마지막 에피소드라 할 '골레러스 부인' 이야기 부분(336p) 옆에 엉뚱하게 죽음을 알리는 요정 반쉬 이야기와 요정들이 춤추는 곳 이야기(273p~288p)가 삽입되는 바람에 골레러스 부인 이야기가 끊기고 그다음에 이어질 부록 '아일랜드 요정의 분류'의 앞부분(349p~352p)이 소실되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막판에 난감했던 부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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