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만화를 준비한답시고 도서관에서 기회만 되면 만화 작법서나 일러스트 작법서들을 찾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종종 만화 창작 기법을 배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쁘고 화려한 일러스트들을 보기 위해 책을 빌려보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하지만 최근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빌려본 만화 작법서들은 왠지 지루하게 읽은 감도 있고, 대개 비슷한 내용을 다룬 다른 책들을 미리 읽은 감이 있어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이 『쉽게 배우는 만화 신화 전설의 세계』는 일찍 발견했지만 다른 작법서들이 옆에 또 나란히 있기에 왠지 제일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본다는 심정으로 미뤄뒀다가 이번에 드디어 빌려본 셈입니다. 다른 작법서들과 비교하면 유달리 책이 너덜너덜한 감이 드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작법서에 비해 제일 인기가 많지 않았나 싶었어요.
책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컬러 일러스트입니다. 딱 보기만 해도 신화 속 존재들에게 영감을 받은 환상적인 캐릭터들을 그린 그림들이에요. 책에 컬러 일러스트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만화나 일러스트 작법서를 찾아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이런 눈 호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랄까요? 단순 만화를 배운다는 목적만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옛날이야기나 신화, 전설이나 동화, 민담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지금도 관련 연구서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그 영향인지 최근에는 괴담이나 도시전설 같은 것도 파고들고 있어서 이 책이 더 흥미가 갔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서 기대한 것은 만화판 산해경같이 세계에 분포된 각종 신화 속 기묘하고 신기한 존재들의 설명과 함께 실린 일러스트나 형상화였을 텐데 좀 예외적으로 책은 그런 종류의 내용만이 아니라 만화 창작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의 목차 부분을 살펴보면 위와 같습니다. 책의 부록으로 마지막 긴 페이지에 각 나라의 대표적인 신화 북유럽, 그리스, 인도, 마야/아스텍, 이집트, 중국 신화에 대한 간략한 자료가 실려있기도 합니다. 제1장 「신화와 전설 속의 캐릭터를 그려보자」 부분에선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요괴나 신비로운 존재들 일부와 함께 그림 그리는 기초적인 방법 예를 들자면 펜 터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모든 만화들이 그렇겠지만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판타지 세계관을 갖춘 작품일수록 이 펜 터치가 가장 중요하게 두드러지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더라고요.
제1장에 실려있는 대표적인 예시. 처음엔 저 원숭이를 보고 『서유기』의 손오공을 묘사한 건가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인도 신화 속의 하누만을 그린 것이더라고요. 알고 보면 『서유기』의 손오공도 하누만의 영향 아래 탄생한 캐릭터니까 제가 착각할 만도 하고... 옆 페이지에 실린 캐릭터들은 그리스 신화 속 키마이라-키메라(위), 유럽 전설에 등장하는 흡혈귀 드라큘라(아래)입니다. 흡혈귀 캐릭터는 전설 속에서부터 그렇기 때문인지 상당히 미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잘생긴 남자라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사진이 좀 흐리게 찍혔지만) 앞 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의 제1장에서는 신화적 요소들에 대한 소개만이 아니라 만화를 그릴 때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부터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실려있는 자료들을 살펴본다면 현재의 디지털 작법보다는 아날로그 작법 쪽에 더 가깝게 설명이 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 외에도 인체 균형 잡기라든가 질감과 광원 묘사 등 신화와 크게 관련이 없어도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설명이 들어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2장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그려보자」 부분에서 판타지 세계 속에 등장할 법한 물건들의 표현, 말하자면 보물이나 보석, 무기, 캐릭터들의 표현에 대해 일러주고 있는데, 판타지 만화를 준비하고 있다면 도움이 될 판타지 세계의 배경 예시, 무기와 보석 같은 소품에 대한 예시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무기 말고도 전설 속에 등장하는 무기들의 예시도 몇 가지나마 실려 있어서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특히 보석과 같은 질감 묘사가 까다로운 것들은 제법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2장에서는 대표적인 신화나 전설 속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예시로 구도 잡기와 묘사에 대한 설명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앞의 컬러 페이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즐거움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예시로 실린 저 장면은 케르베로스와 지옥의 문 묘사. 그리고 책의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이라면...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창작물을 바탕으로 다른 작가들이 설정을 덧붙여가면서 완성된 창작 신화인 '크툴루 신화'에 대한 설명도 실려있다는 점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생전에는 작가로써는 빛을 보지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 정작 그 작품을 바탕으로 세워진 크툴루 신화는 (한국에선 인지도가 좀 미미한 편이긴 하지만) 현재 매체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단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어쩌면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세계관 자체가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란 반증일지도. 참고로 옆 페이지에 잘린 일러스트는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인 '인스머스의 그림자'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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