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꼽는다면 바로 『벌거벗은 세계사』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 본방은 다른 사정으로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재방송은 가능하면 사수하려고 노력 중인데 이번엔 라이프타임 채널에서 재방송을 해 주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아마 방영 시점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 같고, 라스푸틴의 언급이 있는 걸로 보아 홈페이지를 통해 회차를 찾아보니 50화 방영분(2022년 6월 7일 회차)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세계사』의 지난 회차들을 살펴봤을 때 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회차이긴 했는데 마침 오늘 재방송을 해준 덕에 감상을 하게 된 셈이네요.
흥미가 생긴 이유는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직접 개입한 라스푸틴이 워낙 미스터리가 많은 인간인지라 관심을 끌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이번 회차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도 신기하고 기괴한 점이 많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 https://news.nate.com/view/20220607n35995
이번에 강연을 맡으신 교수님 정보와 게스트 정보는 위의 기사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회차다 보니 홈페이지에서 자료 찾기가 힘든 듯.
일단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앞서 먼저 러시아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성기를 누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나옵니다. 초반의 러시아가 몽골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시점부터 표트르 대제의 등장으로 러시아가 거대한 영토를 확장하며 제국으로 성장한 과정이 간략하게 설명되는데요. 실은 몽골제국 지배에서 막 벗어났을 때의 러시아의 영토도 한반도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했다는 사실. MC들마저 그 영토의 크기를 보면서 놀라워했을 정도인데 어쨌든 전 세계의 6분의 1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국토를 자랑하던 러시아는 무려 300년이란 기간 동안 제국으로써의 영향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의 영토도 영토지만 주요 수출품은 모피로써, 유럽의 기호품이었던 모피 수출로 러시아 제국은 엄청난 부를 쌓는 등 그야말로 황금기를 이룩하게 되었다는 설명도 나오고요.
하지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시절이 되면 이 제국의 영광도 끝물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이 러시아 제국의 끝물에 존재감을 확실하게 자랑한 이가 바로 라스푸틴으로 시베리아 지역의 평범한 농민 출신인 그가 어떻게 러시아 황실을 나락으로 몰아갔는지가 이번 강연의 주 내용이었습니다. 라스푸틴은 왠지 현대의 작품 속에서 모든 사건을 좌지우지하는 흑막 혹은 사이비 교주의 모델 취급을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본명은 그리고리 라스푸틴으로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이자 젊을 적에도 그리 좋은 평판이 있던 인물은 아니었고, 당시 이단 종파였던 흘리스티에 빠져들어 난교를 행하는 등 이후 러시아 황실과 접촉하면서 온갖 성문제를 일으킨 조짐이 여기서부터 보인듯해요.
특별한 신분도 아니며 하는 짓도 문제투성이긴 했지만 말빨 하나만은 엄청났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고 다녔고 자식을 잃고 정신줄을 놓은 여자도 그와 대화를 하고 나서 멀쩡하게 변했다고 하는 등 과연 진짜일까 싶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 하나만큼은 특별한 건 사실이었던 모양. 여기서 라스푸틴의 능력은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해주며 안심시키는 그런 종류로, 말하자면 일종의 상담사 역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가 러시아 황제 부부의 신임을 산 건 그런 능력도 있었겠지만 왠지 운과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작용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시 니콜라이 황제 부부가 겨우 얻은 막내 황태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지만 후계자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불문에 부쳤는데요. 니콜라이 2세는 작중에서 설명이 계속 나오긴 합니다만 국정 운영에는 무능했고 악수만 선택하는 암군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혁명가 테러에 끔찍하게 죽어 혁명세력에 부정적이었고 전제군주인 아버지 그늘에 가려진 데다 일찍 황위에 올라 제왕 수업을 덜 받았다고 하지만 그 이유들이 이후의 실정들을 덮지는 못했습니다.
라스푸틴이 황실의 신임을 얻게 된 건 혈우병을 앓고 있던 황태자가 사고로 다쳐 상태가 나빠지자 그의 치료를 위해 종교의 힘을 빌리려고 할 때 마침 그가 나섰기 때문인데, 실제로 라스푸틴의 기도로 황태자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설이 분분하며 미스터리에 가깝긴 하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로 당시 진통제로 쓰인 아스피린이 출혈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그 복용을 중단시킨 덕이라는 설이 하나 있었어요. 라스푸틴이 그걸 알고 아스피린의 복용을 중단시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황태자를 구한 일로 그는 황제 부부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게 되는데 나중에 이것이 라스푸틴에게 약점을 갖다 바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였습니다.
황제와 황비의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황제 부부에게는 듣기 좋은 말만을 들려주며 뒤에선 사람들의 로비와 뇌물을 받으며 부를 쌓고, 또 추종자를 거느리며 문란한 생활을 하는 등 그야말로 요승+괴승+간신배로 요약할 수 있는 짓거리를 모두 일삼습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당시 황제를 부추겨 멀쩡한 대신들을 해임시키고 전쟁 지식이 없는 황제를 총사령관으로 나서게 하며 국정운영에 간섭하는 등 진짜 욕먹어 죽을 짓만 골라서 했다고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황실의 비참한 죽음이 모두 라스푸틴에게 책임이 있다고만 할 수 없는 게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무능과 악수, 그리고 자기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해주는 라스푸틴만을 신임한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자국의 언론에선 황제 부부를 조롱하는 만평과 기사들이 실렸음에도 사태 파악은 전혀 하지 못했던 느낌이랄까. 황비가 성적인 스캔들의 주요 인물로 자주 조롱당한 건 그 시대가 워낙 여혐이 만연했던 시절이라 그랬던 감이 있지만요.
강연에선 러시아 제국의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첫 번째 외부에서 밀려온 자유주의+사회주의 물결과 두 번째 러일전쟁에서 패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된 노동환경 때문에 시위를 벌인 노동자들을 폭력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꼽습니다. 암만 300년을 호령하던 대제국이었다고 한들, 리더가 시류를 읽지 못하고 제 역할을 방치한다면 어떤 나라라도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 혁명가와 반혁명가 세력이 일으킨 내전에 휘말려 비참하게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
라스푸틴은 결국 자신을 견제하던 황족들의 계획에 암살되는데 여기서도 좀 희한한 일화가 언급됩니다. 당시 암살을 주도했던 유스포프 공작이 청산가리가 든 빵과 술을 먹였음에도 멀쩡했다거나 총을 두 방이나 맞고도 도망을 쳤고 세방을 맞고서야 쓰러졌다고 하는데 대체 이 인간은 정체가 뭐냐 싶더라고요. 실제로 청산가리의 독성이 얼마 없었다거나, 총을 빗맞았거나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 수 있었겠지만 참 간신배가 목숨 한번 질기다 싶은 지경. 심지어 라스푸틴이 황제에게 죽기 전에 보냈다는 편지에는 꼭 자기 죽음을 예언한듯한 내용이 나와 진짜 뭔가 싶었는데, 강의에 따르면 실제로 라스푸틴이 자신의 암살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고 편지는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 황제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역사적인 흐름과 편지의 내용이 맞아떨어진 건 우연일 수 있겠지만 어딘가 자기실현적인 예언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cZwYpAh3bXQ?si=iDHwAQfWROdqrh7P
가수 보니엠이 부른 노래 '라스푸틴'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사이비 교주+간신배+사기꾼+그루밍 성범죄자 다 합친 인물이긴 합니다만 그 존재감이 독보적인 건 부정은 못하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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