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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바벨의 도서관 : 러시아 단편집』 리뷰

by 0I사금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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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도 전권이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전 29권인데 도서관 자료를 검색해 보면 18권 정도가 비치되어 있고 그중 어차피 좋아하는 작가나 알만한 작가의 소설들도 다 읽었는 데다, 모르는 작가들의 작품집이 남은 데다 왠지 요새 들어서 재미가 시들시들해진 구석도 있지만요. 그래도 시리즈 하나를 시작한 이상 끝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어쨌든 발견한 남은 책들 중에서 이번에 빌려온 것은 『바벨의 도서관 : 러시아 단편집』입니다. 나머지 소설들은 대충 훑어본 결과 어딘가 좀 난해해 보이는 구석도 있어 보여서 이 『바벨의 도서관 : 러시아 단편집』 이 읽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목차를 살펴보니 실려있는 소설들은 총세편이고 여기서 두 편은 제가 아는 소설이더군요. 


첫 번째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어」이고 나머지 소설들은 제가 예전에 읽은 『클라리몽드 : 아홉 개의 환상기담』이란 기담소설집에 실려있던 「라자로」이며 마지막 소설은 톨스토이의 단편으로 오래전 금성출판사 청소년문고판으로 접한 적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 하면 『죄와 벌』이 유명한데 전 예전에 청소년 버전 축약본이나 만화판으로 본 기억은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내용인지라 뭔가 결말 부분에서 약간의 희망을 남겨두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꽤 암울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 『죄와 벌』을 생각한다면 이번 바벨의 도서관에 실린 「악어」는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다릅니다. 뭔가 별생각 없이 읽어가다가 빵 터질 정도였다고 할까요? 


꼭 예전 인터넷상에서 러시아 유머라고 돌아다니는 그런 것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있어서 혹 이런 유머의 근원이 꽤 오래된 것은 아닌가 싶은 느낌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자인 '나'는 친구 이반 마트베이치 부부와 함께 독일인이 전시한 악어를 보기 위해 나섭니다. 그들이 악어를 구경하고 자리를 뜨려는 사이 갑자기 악어가 덤벼들어 친구 이반 마트베이치를 단숨에 삼켜버리고 충격받은 '나'와 부인은 악어의 배를 갈라 이반을 꺼내려합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 소설엔 종종 독일어 원어와 함께 오자 섞인 어눌한 말투가 나오는데 일단 외국인 설정이라 이렇게 나온 듯- 독일인은 악어는 귀중한 재산이니 내줄 수 없고 배를 가르려면 돈을 지불하라고 버팁니다.


'나'와 이반의 부인이 전전긍긍할 때 악어의 뱃속에서 삼켜진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자기는 괜찮으니 예전에 카드놀이를 하면서 약간 빚을 진 노인 티모페이 세묘니치에게 돈을 대신 갚고 그가 현명하니 도움을 청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와 중에 부인은 악어 뱃속에서 어떻게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얻냐며 걱정하고 '나'는 여자들의 생활 부분에서 보이는 현실성에 놀라는 둥 상황의 심각성과는 딴판으로 주인공들의 태연한 행동이 이 소설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악어 뱃속에 들어갔으면서 별일 없는 등장인물 때문에 악어가 특이한 건지 주인공이 특이한 건지 의문을 갖다가 그냥 소설이 원래 그렇다고 넘어가 버리게 되더군요. 화자는 티모페이 노인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는데 노인은 이반 마트베이치가 평소에 '진보'적이라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다고 하며 화제를 어째 정치적인 것으로 돌려 러시아의 자본을 살리기 위해선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하고 악어의 주인인 독일인의 자본인 악어를 해칠 수 없으며, 이 일은 어디까지나 독일인의 악어 뱃속에 이반 마트베이치가 허가 없이 들어간 탓이라며 그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다시 악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사정을 설명하는데 이런 와중에 또 깨알같이 입장료를 받는 독일인의 모습이 개그라면 개그일까요? 당시 시대배경 탓인지 묘하게 독일인 상인의 모습이 부정적인데 웃기게 그려지는 듯하면서도 중간중간 삽입된 인물들의 다른 이야기나 신문을 보면 유럽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더라고요. 악어 뱃속에 들어간 이반은 자신을 걱정하는 '나'에게 나름 깨달은 것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그와 중에 또 깨알같이 러시아 제품 디스를' 하더군요. '나'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달리 그를 빼낼 방도가 없어 돌아가고 맙니다. 


거기다 이반의 부인은 그가 악어 뱃속에 들어가 더 이상 연금을 받을 수 없다면 이혼을 생각 중이라고 이야기하는 등 소설 내내 약간 골이 빈 것처럼 묘사되는데 자신한테 화를 내는 화자한테 그럼 자신이 남편 따라 뱃속에 들어가냐며 반박하고 또 극상의 남자들이 이런 여자한테 헤롱거리는 게 소설의 일품이에요. 결국 신문에서조차 악어를 잡아먹은 미식가의 이야기나 다른 서커스에서 취객이 알아서 돈을 지불하고 스스로 악어뱃속에 들어간 기사 따위나 나오면서 묘하게 당시 기레기들을 디스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전체적으로 여러모로 풍자가 들어간 단편인 게 보이지만 일단 소설이 너무 웃긴 나머지 다음 단편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부작용이 생겼을 정도. 일단 다음 단편들인 「라자로」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약간 지루한 감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소설집 『클라리몽드 : 아홉 개의 환상기담』에서는 작가인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해주는 대신 여기 바벨의 도서관에선 좀 더 긴 설명을 해주는데 죽음에서 살아난 뒤 자신과 마주친 인간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놓고 스스로 어디론가 사라지는 라자로의 이야기는 어딘가 공포스러운 구석도 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뭘 보고 왔는지에 대한 질문엔 결국 답을 해주지 않으며 다만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거나 불행하게 죽음을 맞거나 하는데 알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은 꽤 오래된 테마이기도 하니까요. 


이 소설은 작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가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다 갔다 하니 작가의 삶을 찾아본다면 더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싶더군요. 마지막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판사 출신인 이반 일리치가 중산층 집에서 태어나 나름의 성공가도를 걸어오고, 성격차 나는 부인과 결혼해 나름 풍파를 겪다가 죽음을 맞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가식과 위선-솔직한 성격의 평민출신 간병인 게라심 정도를 빼면-에 질려하다가 죽음에 도달하면서 나름의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죽음을 맞으면서 본 것이 무엇인지는 해석이 분분하겠으나 이 결말 덕에 보르헤스가 이 바벨의 도서관에 실어놓았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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