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자주 다니는 도서관에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전권이 다 비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좀 아쉽습니다. 보면 읽지 못한 책들 중에도 제가 아는 작가들도 있고, 왠지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도 많은데 목록들을 찾아보면 현재 도서관에 남은 책들보다 그 책들이 더 재밌어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좀 아쉬워서 다른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가 봤더니 역시 아쉽게도 이 도서관엔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가 더 적게 비치되어 있더군요. 한 두권 정도를 발견했는데 그중에서 빌려온 것이 이번 『바벨의 도서관 : 아르헨티나 단편집』입니다.
이 『바벨의 도서관 : 아르헨티나 단편집』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있는지라 좀 기대를 했었는데요. 그런데 첫 번째 소설 「이수르」는 제가 저번에 빌려온 레오폴드 루고네스의 『바벨의 도서관 : 소금 기둥』에 실려있던 소설로 어째 읽을 때 제목이 낯익다 싶더니 같은 내용의 단편이 이번에 실려있더군요. 왜 그런가 했더니 작가가 아르헨티나 사람인 데다 아무래도 보르헤스가 아끼는 작가군에 속하기 때문일까 싶었는데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은 기분도 있어서 이번 「이수르」는 대강 읽고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 소설부터는 제가 모르는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작가들이 다양해서인지 어떤 소설은 재밌게 읽은 반면 어떤 소설은 좀 난해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두 번째 소설 「오징어는 자기 먹물을 선택한다」는 어째서 제목이 이런가 싶었습니다. 내용은 한 마을에서 돈 후안이라는 존경받는 인물의 정원에 있는 살수기가 사라지는 작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학교교사인 화자는 그 집안에서 일하는 자기 제자인 학생에게 그 일에 대해 묻고 마을 동료들과 이 이상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근데 사건이라고 해봐야 개인 정원에서 살수기가 사라진 정도인데 이게 대체 뭔 대수냐고 생각하다가 소설의 전개에는 좀 놀랐다고 해야 할까요? 제자가 밝히는 이야기는 뜻밖으로 돈 후안의 집 창고에 어떤 손님이 와있고 그 손님은 건조한 곳에서 살 수 없는 몸으로 항상 물이 필요하여 살수기를 설치해 두었고 그 손님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온 외계인이며 인간들이 어리석은 인간을 정치가로 뽑은 다음 원자폭탄을 이용할 것을 알고 그것을 말리기 위해 찾아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돈 후안이 다시 살수기를 정원에 설치하여 그 외계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죽기 전에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제 늦었다는 것, 돈 후안 역시 원자폭탄이 떨어지건 말건 자기 지위만 중요한 인간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좀 황당한 결말로 치닫는 소설이긴 합니다만 저 제목이 말하는 '오징어'는 '자기 먹물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사람은 자기 수준 혹은 욕망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한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세번째 소설 「운명은 어리석다」는 처음 읽을 때 마부 주인공이 다리를 다친 일에 대해 무슨 보고서나 된 것처럼 이야기를 늘여 쓰길래 별 희한한 내용도 다 있다라거나 문학에는 별개 다 소재가 된 다 싶었는데 보면 역마차 마부인 주인공이 후에 전차가 도입되면서 점차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게 보여 소외된 사람들의 심리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말에 있어서 그가 처음 사고로 오른쪽다리가 부러진 곳에서 삼십 년 후 그가 끌던 역마차가 전차와 충돌하여 이번엔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데 그가 과거의 사건들에서 왼쪽다리가 다칠뻔한 사건에서 무사했다는 것을 들먹이며 운명은 내 왼쪽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했지만 실수로 삼십 년 전 오른쪽 다리를 부러뜨렸고 결국 다시 왼쪽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사고를 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냥 불운한 사고를 두 번이나 당한 당사자의 합리화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말대로라면 운명이란 참으로 집요하기 짝이 없는 놈이란 거죠.
네 번째 소설 「점거당한 집」은 선대로부터 유산으로 집을 물려받은 두 사촌지간의 남녀가 조용하게 생을 보내다가 자신들의 집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알아채고, 그들이 점차 점거한 공간을 넓히면서 원래 주인인 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왠지 낯이 익은 이야기인데 예전에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모 미스터리 소설집에서 이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나며 그들의 집을 점거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소설은 상상의 저편에만 맡기고 있고 맥없이 정든 집에서 쫓겨나듯 도망가는 두 사촌 남매의 모습은 힘없는 소시민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다섯번째 소설 「역마차」는 짧은 내용이지만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내용입니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선 묘하게 공포와 환상의 중간에 걸쳐진 듯한 분위기를 뿜는 소설들이 많고 저도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이 소설 시리즈를 빌려온 경향이 있거든요. 역마차에 오른 여성 주인공은 미망인인 언니의 재산을 노려 언니의 약에 다른 약을 섞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재산을 차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역마차에 오른 그날 다른 승객들 사이에 자신과 비슷한 차림을 한 여성이 있다는 것을 혼자만 눈치채는데 그 여성은 다름 아닌 죽은 자신의 언니로 주인공이 공포에 질리는 순간 역마차가 사고를 당해 뒤집히고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요.
주위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승객들을 도로 마차에 태우지만 주인공은 나무에 부딪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다른 사람들은 언니를 주인공으로 착각하여 태우고 진짜 주인공을 밖에 홀로 내버려 둔 채 떠나버린다는 내용으로 인과응보의 내용을 다룬 짧은 소설이나 그 전개가 섬뜩해서 맘에 들었습니다. 반면 다음 여섯 번째 소설 「물건들」은 짧은 이야기라도 좀 난해하기 짝이 없었는데 물건을 자주 잃어버려도 그것에 집착을 하지 않고 넘긴 여성에게 잃어버린 물건들이 되돌아오고 그것으로 인해 파멸한다는 내용입니다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시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심정입니다.
일곱 번째 소설 「체스 선생」은 여기 실린 소설들 중 가장 짧은 내용으로 한 남자가 외지인으로부터 체스 수업을 받게 되고 그와 헤어지기 전 체스시합을 하게 됩니다. 남자는 자신만만해져서 스승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결국 패배하는데 마지막 체스 스승이 떠나기 전 자신의 이름을 '신神'이라 밝힙니다. 이것이 진짜 말 그대로 신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비유적으로 체스의 신을 이야기하는 건지 분분하겠지만 뒤의 해석대로라면 굳이 여기 실릴 만한 내용이라 보이지 않고 운명을 체스라 부를 수 있다면 결국 인간이 신의 한 수 아래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여덟 번째 소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우연히 주인공이 한 남자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과거에 개입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신의 어머니나 죽은 연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남자를 추적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서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자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으며 쫓겨나고 주인공은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과거를 본다 해도 부질없음을 나름 깨닫게 되는데 다음날 또 같은 남자를 찾아갔더니 그는 자신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또 타임슬립을 했거나 과거의 개입으로 미래가 변경된 것으로 추측되는 결말이더군요.
마지막 소설 「선택받은 자」는 한 남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어떤 시구를 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묘하게 그의 과거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시대가 등장하는 등 아리송한 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의문점에 대해서는 소설이 전개되면서 풀리게 되는데 그는 바로 오래전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로 앞의 인용된 시 구절 '죽음에서 되돌아와'라는 글이 그대로 복선이었던 셈이지요. 주인공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로 죽음에서 되살아난 뒤 지금까지 쭉 살아있었다는 게 소설의 결말.
이런 사람이다보니 불가능한 시대배경이 언급이 될 수 있던 것이었는데 일단 성경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인간이 불사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묘사로는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벨의 도서관 : 아르헨티나 단편집』을 다 읽게 되었는데 기대에 비해선 조금 아쉽게도 호불호가 갈리는 소설들이 좀 많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건 한 작품집에 실린 작가가 다양하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경우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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