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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비소설 기타

『쌍전(雙典)』 리뷰

by 0I사금 202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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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서관에서 만화 『수호지』 를 찾아보고 느낀 거지만 어느 정도 각색이 되어 있는 만화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굉장히 불쾌감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삼국지』에 비하면 『수호지』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일반적인 인식과 비교해 봐도 이것을 정의나 의협으로 포장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내용이 허다했거든요. 물론 『삼국지』라고 해서 멀쩡하다 싶은 내용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 저자가 지적하는 내용이 제가 어렴풋이 느꼈던 바와 비슷하기 때문에 책을 술술 읽은 감도 있습니다. 마치 책의 제목인 『쌍전』은 『수호지』와 『삼국지』 두 개의 고전을 가리켜 '雙典'이라는 한자를 읽은 것입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쌍-'이란 욕설이 많이 쓰이는 것을 알고 난다면 이 책의 제목은 한국독자에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확률이 높습니다.


책은 서문에서 문학비평과는 다른 문화비평적 관점에서 두 개의 고전을 비판한다고 하는데, 문화비평이란 책의 예술성이나 심미성, 문학성과는 상관없이 책이 다루고 있는 문화적인 인식이나 사상, 관념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고 합니다. 일단 책은 두 개의 고전인 『수호지』가 『삼국지』가 소설로서 충분히 가치 있음을 인정하고 가는 바입니다. 다만 시대적 한계랄지 작가의 한계랄지 책이 다루는 풍조를 자세하게 다루는데,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시대적인 한계를 감안해도 불쾌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과 현실에서 적용될 때 불합리한 내용들이 어떻게 포장되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개는 『수호지』의 폭력숭배, 인명경시 풍조와 배타성, 잔혹한 여성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수호지』보단 덜하긴 하지만 『삼국지』 역시 암암리에 이러한 측면을 보이면서도 『수호지』와 다르게 폭력보다는 권모술수가 펼쳐지고 그것을 신기하고 대단하게 묘사한다고요.


책에서는 『수호지』와 『삼국지』가 단순 문학을 뛰어넘어 중국인들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매체가 과연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느냐 마느냐 굉장히 딜레마스러운 테마일 겁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매체에 대한 탄압으로 번질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가공매체상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는데 제가 찾아본 범죄학 서적에서도 매체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 경우가 기억이 납니다.  한쪽 서적에서는 처음부터 불안정한 인간이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공매체를 참고한 경우는 있어도 가공매체가 그 범죄를 일으킨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는 결론을 내린 반면, 다른 서적에서는 잔혹한 범죄를 거르지 않고 매체를 통해 전달하거나 혹은 사이코패스와 존재를 신비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면서 생활 속에서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인간의 어두운 환상을 부추겨 모방범죄를 양산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즉, 범죄를 다루는 책에서마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하나 확실한 것은 인간이 매체를 가려낼 수 있어도 매체가 인간을 가려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수호지』가 싫다고 여기면 그 『수호지』를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수호지』나 『삼국지』 같은 소설은 누가 자신을 읽을지 결정할 능력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분명 환상과 실제를 구분 못하는 놈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고 이 문제는 아마 한 세기가 지나도 논란이 될 화두일 게 분명합니다. 다만 『수호지』와 『삼국지』가 단순 인간사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문제가 매체에 반영된 것이라면, 『수호지』와 『삼국지』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중국 민중의 문제점이 될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수호지』와 『삼국지』가 동시에 다루고 있는 테마라면 사람들끼리의 결의와 의협인데-실상 『수호지』는 의협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의리로 맺어진 그룹의 배타성은 이기적인 가족애와 가깝다는 게 책의 요지입니다. 

 

책에 따르면 중국의 제도는 처음엔 유용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변하자 그것에 대항하여 생겨난 것인 친한 사람들끼리의 그룹 형성-결의형제-이며 사회의 법치보다 개인의 정과 의리가 우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고 하는데, 이런 의리의 화신으로 정점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으로 모셔지는 관우입니다. 관우신앙을 다룬 책을 리뷰하면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관우가 민중에게 받들어진 이유는 유교의 충의사상보다는 협객정신과 생전에 보인 의리 때문이라 밝힌 바 있는데, 관우의 '의'는 유비 개인에게 향한 것이고 이는 정의 감정에 충실한 결과물이라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표리부동하다고 평하는 『삼국지』의 인물들 중 감정과 행동이 일치했던 관우는 인간사에서 분명 드문 인간이며, 그 생전의 삶이 대단한 것은 틀림없으나 연의에서 그려지는 관우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가족의 정과 의무(형제애)에 가까운 측면이 있으며, 이는 사회적인 의무와 대치되는 경우에도 미화된다고 비판받는데요.

 

분명 소설적으로 훌륭한 화용도씬은 명장면임에 틀림없으나 여기서 관우는 조조를 놓아줌으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사회적 임무를 방기했다는 점입니다. 즉 『삼국지』의 문제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적인 임무나 제도보다 앞서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미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이 관우신앙의 모습은 다르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는데, 앞서 밝힌 바처럼 사회적 제도와 법치가 후대로 갈수록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한다면, 관우의 의리가 다시 재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거기다 민중의 삶은 여전히 살기 어려울 것이고, 감정적인 요소가 특히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관우의 신앙은 앞으로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유교적 껍데기가 벗겨진 관우는 이젠 초월자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되었기 때문에요. 따지고 보면 『삼국지』 2차 창작물들 중에서 의외로 관우의 모습에 근접했던 것은 웹툰 『삼국전투기』 후반부 묘사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저자가 또 하나 가장 크게 지적하는 것은 남자들끼리의 의리로 그룹이 형성되면서 생겨난 배타성, 그중에서 그룹외 인물과 여성에 대한 배타성입니다. 두 고전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사물화-물건화는 『수호지』와 『삼국지』 둘 다 공통적인 면모가 있습니다만 설령 내용의 축이 남성에게 쏠려 있어 여성을 단편적으로 그린다 해도 지나친 점이 분명 있다는 것을 책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선 대표적인 케이스가 유안의 아내 죽여 고기 바치기와 같은 것이 있고, 『수호지』에서는 여성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데, 염파석이나 반금련과 같은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이규가 단순 남녀가 밀회한다고 하여 그 둘을 죽이고 여자의 아버지에게 딸이 죄를 지어서 죽였다고 하는 것, 불륜을 저지른 부인과 이혼을 결심해 놓고 친구의 말에 넘어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이는 행위, 동료를 만든다는 이유로 남자의 애인과 친지를 죽여 누명을 씌우는 행위 등등 수호지는 그야말로 '명예살인'과 같은 케이스가 수시로 등장합니다. 


명예살인의 본질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죄악은 모조리 여자에게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고, 또 여기서 쓰이는 살해방법은 때때로 변태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저 전제가 과연 합당하느냐 의문이 생길 수밖에요. 욕망을 나타낸 여자에 대한 응징을 살인의 방법으로 풀어낸다면 그것 역시 욕망을 저열하게 표현한 것인데 소설이 그것을 비판하진 않거든요. 이 소설은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동료를 얻기 위해 어린아이를 도끼로 쳐 죽여 누명을 씌운 다음 자기 무리로 끌어들이거나 백성들을 학살하는 일도 하늘이 시킨 일이라며 합리화하는 경우도 상당하지요. 그리고 자기들 무리 외의 인간을 죽여 인육만두를 만들어 먹는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의리로 맺어진 그룹의 배타성과도 통합니다. 문제는 이런 행동을 하면서 『수호지』를 편찬하고 평론한 이들이 이것을 미화한 것인데, 노지심과 같은 인간미 넘치는 인물은 낮게 평가하면서도 사람 목숨 취하는 데 거리낌 없는 무송이나 이규는 마치 천인처럼 묘사한다고요.


이런 점은 소설이란 매체가 갖는 인간의 그림자 부분 해소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을 마치 정의로운 일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저자가 지적한 대로 분명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분명 그림자의 해소 부분도 설득력이나 개연성이 있어야만 독자가 제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할 점은 현실의 인간들 중에서도 『수호지』와 『삼국지』의 행위를 흉내 내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으며 『수호지』와 『삼국지』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본래의 역사적 인물에 훼손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특히 골치를 앓는 문제겠지만, 역사의 기록보다 재구성된 이야기가 더 민중에게 먹히는 점이 있어서 암암리에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린다는 건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경우에 해당되긴 합니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두 고전의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결국 읽을 때 재밌게 읽더라도 그 내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독자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이야기로 귀결이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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