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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민음사판 『분노의 포도』 2권 리뷰

by 0I사금 202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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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버전의 『분노의 포도』 2권입니다. 전권에 이어 캘리포니아에 들어선 조드 일가의 고난이 여전히 진행되는데, 국영천막촌(홍신문화사 번역은 국영캠프)과 일반 후버빌(일반적인 천막촌들의 통칭)의 생활상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국영천막촌은 그 이름 그대로 나라에서 어느 정도 지원이 나오면서 그 근방의 치안과 질서를 이주 농민들 스스로 맡아 해결하고 있는데, 이런 질서를 갖출 수 있는 것도 그들이 국가에서 지원받기 때문이라면 책에서 지적하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비판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특히 미국은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거나 혹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지원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지원을 못 받는 일이 생기지는 않나 싶어요. 보통 개발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이주시킬 때 나라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했는데 (거기다 배경이 강대국인 미국이기도 하고) 초반 주인공인 조드 일가가 어째서 빈털터리 상태로 고향을 떠났느냐는 의문이 풀리더군요.


책에서 보면 국영천막촌에서 사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자선을 위선적인 것으로 여겨 자신들을 굴욕적으로 만든다고 천막촌 내의 지원마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들도 있고, 천막촌 외부의 인간들은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영천막촌'의 사람들을 '빨갱이'로 규정한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국영천막촌이 사람들에게 베푼 것은 위생적인 공간과 음식, 투표권 그리고 약간의 친목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마치 제삼자들인 경찰이나 외부인들의 눈엔 조드 일가를 비롯한 이주 농민들이 그런 것을 누리는 것을 가당치 않는 것처럼 여기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들 눈에는 오키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 현실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물건을 원하는 것도 사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거나 놀러가는 것도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애초에 그런 것을 원하는 바람마저 갖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여기는 인간들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들의 말로는 안그래도 가난한데 가난을 극복하고 싶다면 죽을 정도로 노력해야지 한눈팔 시간이 어딨느냐는 건데,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죽을 정도로 노력해야 하며 인간적인 여유도 누려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속내는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거슬린다는 말이면서요. 따지고 보면 성공하고자 맘먹는 인간들은 소수고 실제로 그렇게 성공하는 인물도 소수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대개 생계유지가 된다면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 그렇게 열나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애초에 성공의 가능성이 낮은 사회에서 죽을 정도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도박이거든요. 애초에 죽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것도 아니고요. 따지고 보면 현재의 인간들의 생각은 존 스타인벡이 그려내는 1930년대의 경제공황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은 거 같습니다.


책을 다시 읽어가면서 예전에 놓쳤던 부분도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조드 일가의 삶은 국영천막촌을 제외한다면 불행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도 캘리포니아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양심을 갖춘 인물들이 있는데, 조드 일가가 국영천막촌에서 만난 소규모 농장의 주인이나, 후반 조드 여사가 톰과 헤어지면서 만나게 된 작은 목화농장 주인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말투에서부터 어느 정도 노동자들을 배려해주는 것이 드러나는데, 다만 인간적인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농장의 주인이다 보니 그 힘이 매우 미약하여 협회나 조합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소설 내에서도 '오키'들을 적대하는 캘리포니아인들마저도 실상은 거대한 제도 아래에 깔린 이들이라는 사실이 누누이 지적되기도 합니다만. 이후 소설의 흐름은 예정대로 짐 케이시 목사의 죽음과 톰 조드의 살인, 그리고 가족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차남인 앨이 다른 집안의 여자와 혼인을 치룬 후, 어느 정도는 조드 일가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후반의 분위기를 본다면 결국 조드 일가를 떠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홍수 속에서 로저샨이 아기를 사산하는 것으로 비극적인 분위기가 더 강해지지만 결국 이 비극이 숭고한 결말을 이끌어내어 읽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데, 큰아버지인 존이 '네가 거리로 흘러들어 가 사람들의 눈에 띈다면 그들이 뭔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죽은 아이의 시신을 담은 상자를 물가에 흘려보내는데요. 존이 이 일을 맡게 된 이유는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 평생 괴로워하던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그의 말을 보면 노동자들인 그들도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로저샨은 피신한 곳에서 아들에게 음식을 다 주는 바람에 굶어 죽게 된 남자에게 젖을 물립니다. 소설의 해설 부분에서 비평가들이 현실고발적인 작품이 감상적인 결말을 냈다며 비판한다고도 하지만 『분노의 포도』의 이런 결말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이 걸작이 될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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