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는 이미 한번 읽은 적이 있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어 개봉했다는 이야기도 본 바 있으므로 언제 한번 영화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 사람을 질겁하게 할 부분이 많아 영상으로 보면 충격을 먹긴 하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고요. 그래도 인터넷으로 찾아본 영화의 평이 좋은 것이 많아 궁금했었는데 마침 수퍼액션 채널에서 방영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더 로드』라고 치면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고, 같은 제목의 공포영화가 한편 더 검색되어 나오더군요. 원래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니 다른 공포영화라도 상관없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과연 어느 영화일까 기다렸더니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아라곤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 비고 모르텐슨의 얼굴을 비추면서 이 영화가 코맥 매카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덤덤하게 사건을 진행하는 고로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 나는데 영화에서 이 정적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정적이고 덤덤하다 하더라도 소설의 묘사를 보면 식인이라던가 인간을 경계할만한 상황이 많이 묘사되어 긴장을 유발하는데 이것이 영화에서 어떤 영상으로 묘사할지도 궁금해졌어요. 영화는 분명 컬러영화임에도 전체적인 톤이 무채색을 연상시키는데 아마도 핵폭발로 인한 멸망을 암시하듯 흐린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과 재를 뒤집어쓴 듯한 건물과 대지, 마른나무들로 가득 찬 배경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행색마저도 오랜 여행으로 인해 많이 낡고 너덜너덜해져 있어 그런 우중충한 톤을 배가시키지요. 영화에서 컬러가 또렷하게 나오는 것은 핵폭발이 일어나기 이전 주인공인 아버지(비고 모르텐슨 분)가 회상하는 과거의 모습이며 과거의 선명하고 또렷한 컬러는 현재의 우중충한 컬러와 대비되어 비극적인 분위기를 가중시킵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소설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는 편인데 식량부족에 대한 묘사가 좀 더 단적으로 묘사된 느낌입니다. 중반에 주인공 부자가 누군가가 버리고 간 방공호를 발견하기 전까진 식량을 구할 만한 곳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식량을 기대하고 간 헛간에서는 자살한 가족으로 보이는 세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이 연출됩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이런 장면이 나와 충격을 안겨주는데 후반 식인종들이 사람을 잡아가두거나 잡아먹었음을 암시하는 핏자국, 혹은 사람 사냥하는 장면을 보면 산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죽은 시체를 발견하는 것이 더 안심이 되는 상황이 연속되며,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만남은 소설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주인공들이 방공호를 떠난 뒤 마주친 노인과의 만남 정도였어요. 소설 속에선 덤덤한 묘사 때문에 이 장면도 덤덤하게 넘어갔던 것 같은데 영화에선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 덕인지 보는 사람이 더 슬퍼질 정도였달까요.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주인공들이 식량을 구하고 며칠을 지낼 수 있었던 방공호가 어째서 비어있었냐는 점입니다. 그 방공호는 마치 이런 상황을 대비라도 한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모양새로 다량의 통조림과 책, 기타 일상 물품과 심지어 전기까지 들어올 정도의 시설이었음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읽었을 때에는 방공호를 만든 이가 한동안 거기서 생활을 하고 물건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채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났나 싶었는데, 영화를 보아하니 주변 건물에서 시체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피 전에 방공호 주인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로 보이더군요. 방공호가 주인공들에게 꽤 안락함을 선사했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좀 더 그 자리에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방공호 위에서 개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인기척이 나는 바람에 주인공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소설 상에선 모든 동물이 거의 멸종했단 언급이 있으므로 개가 나오지 않지만 영화에선 개가 생존했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후반의 장면과 관계가 깊어요.
하나 영화를 보면서 또렷한 인상을 받은 것은 아들의 성장이 영상으로 봤을 때 더 눈에 띈다는 점입니다. 초반 아버지에게 기대는 아들의 모습이나 사람을 식량창고에 가둬두고 인간도축을 벌이는 식인종들의 집에서 탈출할 때의 모습을 보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을 더 강하게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영화에 최고로 공포심을 유발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아버지는 몸이 병들어감을 느끼면서 아들의 자립을 생각하지만 초반의 모습을 보면 과연 아들이 아버지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하지만 후반부 들어서 자기 또래의 아이를 발견하거나 노인에게 식량을 나누어달라고 얘기하거나 옷을 훔쳐간 도둑을 붙잡고 빼앗긴 물건을 비롯 도둑의 옷까지 빼앗으려는 아버지를 만류하는 모습을 보면 점차 아들이 단순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것이 아닌 아버지의 행동에 옳고 그름을 제기하며 자신의 주장을 하는 등 점차 반항적인 동시에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인지라 주인공들이 극도로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아들은 점점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세상이 멸망한 와중에도 아들이 옳고 그름, 도덕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 놀란 바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 잡아먹는 것은 결코 안된다는 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아버지의 헌신이 빛을 발한 영향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영화 내에선 소리와 시체의 흔적등으로 암시가 되는 정도이나 그 효과가 엄청나며 그런 참상을 보면서 반작용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끔찍한 일이란 것을 깨달은 건지도 몰라요. 그리고 후반 주인공 부자를 발견하고 쫓아왔다고 나오는 가족으로 보이는 나그네들은 초반 아들이 우연히 목격한 남자애의 일행인데 이 일행 중에 여자와 아이가 있고 개가 있는 걸로 보아 약자들과 연대를 하는 인간성이 어딘가에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이 절망스러운 와중에 마지막 희망을 안겨주며 영화는 막을 내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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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주인공들의 성장을 빗대는 묘사로 바다를 찾아가는 장면이 영화에 많이 나오는데요. 이 영화에서도 두 부자가 향하던 곳은 바다였습니다. 결코 예전처럼 푸른 바다가 아니지만 그곳에는 주인공들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모습마저 비치는데 왜일까요?
역시 바다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무의식이 있어 바다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것이라나요?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 멸망을 다루었던 영화 『캐리어스』에서도 주인공 일행이 향하던 곳이 바다였던 것을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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