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권 리뷰입니다.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그 양이 월등하게 두꺼운 '선조실록'인데요. 이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엄연히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현대적으로 이것을 분석하고 재해석한 다른 연구서적들을 참고하여 작가분이 유려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책입니다. 거기에다 간간히 현시대적인 풍자가 보여서 그런 것을 종종 찾아보는 재미도 있고요. 분명 왕들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맞지만 표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은 반드시 왕이 아닌 그 왕의 시대에 한 족적을 커다랗게 남긴 이들이 장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개국의 토대를 마련했으나 후대에 간신으로 몰린 '정도전'이나 개혁을 꿈꿨지만 결국 좌절당한 이상가 '조광조'라거나,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 '문정왕후'라거나... 하는 인물들이 가끔 왕대신 표지를 장식하는데 이번 10권의 표지를 장식하신 분은 바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실 그분 '충무공 이순신'장군입니다.
제가 '세종/문종실록'을 보면서 그 아버지(태종) 못지않은 대단한 능력자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성품에 애민을 실천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왕이었기에 '대왕'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은 분이라 세종대왕을 다시 찬양하게 되었다면, 이 '선조실록'편은 오히려 이순신 장군님을 다시금 찬양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선조실록이 다른 책보다 두꺼운 이유는 이 만화의 토대가 된 사료 '선조실록'이 두 가지 원래의 '선조실록'과 전쟁으로 소실된 부분을 보완한 '선조수정실록' 두 가지이기 때문일 거 같습니다. 게다가 조선사를 전기와 후기로 가로지르는 전쟁 '임진왜란'이 바로 여기에 끼어있기 때문에 다뤄야 하는 내용이 엄청 많아졌기 때문도 있고요. 중종시절부터 암암리에 조선사회의 문제점이 튀어나왔고 명종 때에 서서히 절정을 다다르기 시작하더니 임진왜란은 아예 그 파열된 사회를 흔들어버리는데, 보다 보면 용케 망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선조대에는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권신세력들이 몰락하고 사림들이 정계로 진출하는데, 책 속 백성들의 말마따나 그나마 권력을 잡자마자 동서로 분열해버립니다. 여기서 동인과 서인은 각각 어떤 스승을 두느냐와 어떤 세력가 편에 있느냐로 갈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반의 이야기는 십만 양병설을 주창한 '율곡 이이'가 주인공입니다. 서인의 대표 정도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이는 생전에 양 당의 화해를 위해 애쓴 인물로 굉장히 현실적인 안목과 뛰어난 머리 거기다 중용적이고 균형적인 태도를 가진 이였습니다. 서인으로 추대된 것은 후대에 제자들이 대개 서인이 되면서 그렇게 된 것. 어쩌면 조광조와 유사한 느낌도 받았는데 이이의 불운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가 그를 특별히 중용하진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실에 격세유전이라도 있는 것인지 선조는 중종의 방식처럼 신하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좌를 유지하는 방식을 선보입니다. 예전에 역사스폐설과 같은 다큐멘터리나 친구의 리포트를 도와주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정여립의 반란'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는데 오로지 미스터리로 남은 이 사건은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한 선조의 작품이라는 게 현재 사학자들의 결론. 이때 벌어진 피바람의 오명은 온전히 정철('관동별곡'을 지은 그 정철) 이 뒤집어썼는데 이것 또한 손을 더럽히지 않은 선조의 방식이었다는 거죠. 차라리 여기까지는 나름 왕위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안이었다고 이해해 줄 수도 있었을 법한데 임진왜란을 맞으며 보이는 선조의 뻔뻔스러움은 만화로 보고 있다고 해도 열불이 뻗칠 정도입니다.
왜군의 침입은 만화속에서조차 파죽지세로 표현하며 물밀듯이 몰려오는데 당시 조선정부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손을 놓고 있었고 소소의 몇몇 혜안을 가진 외야의 사람들만이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초기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에는 당시 정계의 복잡한 사정도 있었지만 그동안 이어져온 문제점, 문에 치중하여 무를 방치하여 결과적으로 국방에 힘을 쓰지 않고 관료들마저 해이해진 탓이 컸습니다. 결국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은 선조는 파천을 결심하고 수도를 떠납니다. 이때 분노한 백성들이 왕궁으로 달려가 불을 지르면서 상당수의 사료가 불타서 없어지는데 이걸 보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당시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 죽음이 와닿은 백성들 입장에서 무능한 그들에게 분노를 그런 식으로 폭발시키는 것도 어쩔 수 없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MBC 드라마 『허준』에서도 등장하는데 미처 수도를 떠나지 못한 허준이 왕궁으로 달려가 불을 지르려는 백성들과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요. 거기다 평양에서마저 선조가 뜨려는 낌새를 보이자 분노한 백성들이 선조에게 달려가 말위에서 끌어내리며 욕을 퍼붓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엄청난 짓이건만은 오히려 속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열받는 일은 더 나오는데 의병들의 수장인 김덕령 장군이 역모 누명을 써서 죽고, 곽재우 장군과 같은 의병장들은 왜란 직후 포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특히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은 생전에는 모함당하고 끌려가서 고문당하더니 사후에는 선조의 일방적인 깎아내리기를 당합니다.
분명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해군의 승리가 파죽지세로 몰고오던 왜군의 기세를 꺾고 거기에다가 아예 전쟁의 향방을 틀어버리는 거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무능한 원균을 싸고돌며 이순신 장군을 폄훼할 뿐만 아니라, 승전의 이유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여러 장수와 병사들,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의 노고가 아닌 명군의 덕이라고 돌리는 등 만화의 말마따나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는데 선조의 이런 행동은 이순신장군이나 의병장들에 대한 견제- 그것도 열폭에서 비롯된 경계심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가장 억울하고 분해하는 일이 진심을 갖고 있어도 상대방이 몰라주거나, 열심히 했음에도 그 수고가 외면받을 때일 텐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을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그 많은 장수와 의병들의 상황이 딱 그렇습니다.
만화 중반에 김덕령 장군의 죽음 이후 의병들이 더 이상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몸을 숨겨버리는데 그들을 절대 비난할 수가 없겠더군요. 근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 선조실록은 이번 10권에서 끝나는데 앞으로 더 화날 일이 남았다는 겁니다. 다음 권이 광해군인데 광해군이 전쟁 중에 책봉되었는 데다 전쟁 후에는 선조가 싸놓은 X을 치우는 일 때문에 그건 그거대로 열받을 것이고, 광해군 다음이 인조일 텐데 이 '인조실록' 때가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가장 열받을 내용들이 나올 거라고 나름 기대하며 긴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조하고는 급이 다른 분노가 몰려올 거 같군요. 지금 이렇게 제가 열받는데 그리시는 작가분은 또 얼마나 열받으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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