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권입니다. 저번 '연산군일기'에서 보통 왕 두 사람이 한 권에 나오는 경우가 있고 드문드문 왕 한 사람의 일대기가 오로지 차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까지 읽은 것을 살펴보니 (개국 편은 제외하고) '태종실록'과 '연산군일기'가 그러합니다. 태종의 이야기는 태종의 업적이 장난이 아닌 데다 등장인물의 카리스마도 보통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조선이란 토대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지라 한 권의 분량을 모조리 차지해 버려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연산군은 딱히 업적이랄 것도 없고 작가분의 후기에 의하면 기록도 부실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조선왕조사에서 보기 드문 암군+폭군에다 그 성장과정에 숨은 비극사 때문인지 전해지는 야사도 많고 모티브로 창작되는 이야기도 많은 데다 나름 개성적으로 어필하기 때문일까요?
연산군일기도 오로지 한권을 차지하는데 그의 동생을 다루는 중종의 이야기도 오로지 한 권에 해당합니다. 다음 권은 '인종/명종실록'으로 역시 두 왕 이야기가 한 권에 들어있고요. 넷상에서 만화의 순서를 검색해 보니 큼지막한 사건이 있는 왕인 경우 보통 한 권에 실려있는 거 같더군요. 중종은 형인 연산군과 인종-명종 시절의 문정왕후의 포스 때문인지 딱히 크게 두드러지는 점이 없고 사람들도 흔히 인기 많던 사극 『여인천하』의 유약한 임금의 이미지로 많이 기억될 듯싶은데 의외로 이번 권에서 그런 중종의 이미지를 바꿀만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반정 세력에 의해 원치도 않게 왕위에 오른 것이므로 중종이 믿을 만한 세력이 없었단 사실 정도야 저도 알고 있었고 그나마 인상적인 이야기는 책 『조선기담』에서 어린아이 발목상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어린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제도를 정비한 드문 행적이 눈에 띄었을 나름이었습니다.
책에서는 당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버림받은 어린 아이를 위해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 준 인물은 당시의 가장 힘이 없던 왕이라고 실어놓은 구절 때문에 중종은 힘이 없어도 인간미 있는 왕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만화책을 보니 웬걸 생각과는 다른 면모가 펼쳐져서 놀라웠습니다.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행동을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측면이 보입니다. 말년에는 신하들에게 짜증을 부렸던 세종과 성종과도 다르게 철저하게 신하들의 말을 들어주고 만사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면에는 힘이 강해지는 공신들을 경계하고 공신들을 배후에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하는데요.
조광조를 몹시 아꼈으면서도 막판에 조광조를 숙청한 일은 중종이 신하들에게 휘둘려서, 간신들의 말에 넘어가서가 아닌 조광조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중종이 사사를 명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후에 김안로를 숙청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게 되풀이되더라고요. 조광조의 숙청으로 결국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는 당시 조선시대가 직면한 모순점을 고칠 수 있는 방안에서도 멀어지게 되는데, 책의 설명에 따르자면 중종은 '왕좌의 유지라는 최우선 목표만 있었지, 장단기 구상도, 일의 선후도, 일관된 원칙도, 책임성도 없었다'라는 게 이유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중종 시대에 그려지는 백성들의 삶은 연산군 시절보다 나아진 게 없으며, 오히려 더 피폐해저가는데 아직 시기가 좀 남아 있기만은 읽는 저로선 여기서부터 벌써 '임진왜란'의 조짐이 보이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 일본의 정세가 어찌 됐는지 자세하게 나오진 않으나 중종대에 발생한 3포 왜란도 그렇거니와 비변사의 등장, 민생 불안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이탈과 관료들의 해이와 부패 등등... 이건 임진왜란 전의 민심과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나요? 다음 '인종/명종실록'을 지나면 '선조실록'이니 제 시선이 마냥 앞서나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약하자면 이 중종 시절부터 조선의 모순점이 온전히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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