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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야성의 부름(민음사판)』 리뷰

by 0I사금 202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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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 : The Call of the Wild』의 리뷰를 쓰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읽는 것만으로는 순전히 네 번째입니다. 첫 번째 읽기만 했던 것은 금성출판사 청소년 문고판의 『야성의 절규』라는 제목의 번역본이었고, 블로그에 리뷰를 쓴 것은 두 가지 버전으로 하나는 궁리출판사 버전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문예출판사버전의 『야성의 부름』이에요. 왠지 갑작스럽게 이 소설이 생각나서 도서관에는 다른 번역본이 없나 찾아보니 웬걸 아동자료실에 번역본이 여러 개 비치되어 있고 일반자료실에는 겨우 한 종류의 번역본만 찾을 수 있었는데, 바로 이 민음사 버전이었습니다. 여러 번 읽은 소설이지만, 그 소설의 흡입력이 강해서 거기다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이 많으므로 거의 빨려들 듯이 읽어 내려갔는데요. 

 

밀러 판사댁의 늠름한 '왕' 같던 개 벅을 노름빚을 해결하려던 하인 마누엘이 훔쳐 썰매개로 팔아남기고, 벅은 처음엔 자신의 바뀐 상황에 당황하고 굴욕을 느끼면서도 서서히 썰매개로 적응하면서 동시에 유전자 깊은 곳에 박혀있던 원시와 야성의 기억을 되살리고 인간들과의 애정이 끊어지자 야생으로 돌아가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늑대무리의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썰매개로 팔리기 직전 몽둥이를 둔 붉은 스웨터 사내에게 폭력으로 제압당한 뒤부터 그 후에는 오로지 죽거나 죽이거나 할 뿐인 북극의 땅에서 살벌하게 살아남는 벅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문명 vs 자연의 모습으로, 은연중에 남부-자비-법률로 상징되는 문명의 허약함을 지적하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제 생각에는 인간이 집단활동을 하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일구게 되는 문명도 일종의 자연적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거라 보기 때문에 인간의 문명을 자연과 항상 대립구도로 놓는 것 또한 편견처럼 여겨집니다. 책의 해설 후기에 따르면 저자인 잭 런던이 문명과 자연의 대립구도를 통해 문명의 허약함을 비판한 이유는 인간의 자만심을 풍자하기 위한 도구라고 나오더군요. 거기다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벅과 손톤의 애정관계는 앞서 언급되는 남부의 허약함과는 다른 순수한 애정관계지만 그것 역시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을 소설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손톤 역시 남들보다 현명하다고 하더라도 금에 홀리거나 벅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등 허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어리석은 주인의 학대 속에서 손톤이 벅을 구하게 되면서 손톤에게 생겨나는 애정은 조건없이, 보답 없이 무한하게 사랑하는 것으로 그려짐으로써 초월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소설 상에서 그려지는 벅의 모습은 충심이 아니라 숭배와 비슷해서 어쩌면 종교적인 느낌까지 나기도 했습니다. 벅이 끊임없이 야성의 소리에 끌리면서도 벅은 손톤에 대한 애정을 기억하면서 다시 그에게 돌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인디언의 습격으로 손톤과 그의 동료들이 몰살당하고 인간과의 연결관계가 끊어진 벅은 야성의 부름에 이끌려 잿빛늑대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며, 손톤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인디언들 몇 명을 직접 물어 죽임으로써 몽둥이를 들지 않은 인간은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거의 두려움까지 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건 벅을 인간의 곁에 둘 수 있던 고리들 중 하나는 손톤에 대한 애정만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으로 인한 배움 - 몽둥이를 든 인간에겐 복종해야 한다는 믿음도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애정이 아니라 증오도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죠. 왠지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가 생각나기도. 외에도 이 소설집에는 「불을 지피다」라는 단편이 실려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리뷰한 『야성이 부르는 소리』에 같이 실려있던 「불을 피우기 위하여」와 같은 내용인데 추위 속에서 얼어죽어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웬만한 공포소설 뺨치는 거 같습니다. 여기서도 개와 인간이 등장하지만 이 둘 사이에 손톤과 벅과 같은 애정은 존재하지 않아도 나름 인상적인 소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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