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시리즈에 관심이 생겨 하나둘씩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단편 연작소설인 『피리술사』를 읽고 이 소설과 관련된 시리즈가 어딘가에 있을 거 같아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일본 소설 코너를 찾아보니 금방 찾아볼 수 있더라요. 비슷한 표지를 위주로 단편집을 골랐더니 목차만 보고도 대강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읽은 단편집 『 피리술사'에서 흉가 관련 언급이 나왔고 이번 빌려온 소설집 '흑백'의 목차에서도 흉가라는 단어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것이다 싶었거든요. 소설의 목차와 앞부분을 대충 훑어본 결과 이 '흑백'이란 단편집이 '피리술사'의 전편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는데 다만 '피리술사'보다 책에 실린 소설의 가짓수가 좀 더 적은 편이고 소설의 분량 자체는 좀 더 긴 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설 시리즈의 첫 편이다 보니 괴담 모임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인 오치카에 대한 소개가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 편입니다.
첫 번째 소설 「만주사화」는 오치카가 어떻게 '흑백의 방(제목에서 가리키는 흑백이 바로 이 방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에서 괴담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첫 번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목의 만주사화는 무엇인가 했는데 다름 아닌 여름에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안화 꽃을 달리 이르는 이름이더군요. 꽃이 예쁜데도 꽃에 얽힌 이미지가 그래서인지 아니면 독이 있기 때문인지 피안화는 매체에 등장할 때마다 상당히 불길한 이미지를 얻는 꽃 같다고나 할까요.
이 꽃에 얽힌 창호상인인 도베에의 비극이 주 내용으로 과거 도베에에겐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이좋은 형이 있었으나 평소 사람좋던 형이 마가 씐 건지 사람을 때려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인생이 뒤틀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도베에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오명이 싫어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형을 외면하고 결국 형은 만주사화를 바라보며 자살을 하게 됩니다. 결국 도베에는 형을 죽인 것은 자신이란 생각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하지만 소설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 살인을 저지른 혈육을 둔 사람의 불안과 고통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지켜보는 세상의 매정한 눈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두 번째 소설 「흉가」는 다른 시리즈인 '피리술사'에서 한번 언급되었던 오치카가 직접 나서 흉가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단편 「흉가」에서 모든 기승전결이 드러나나 싶었지만 오히려 이 이야기는 흑백의 방에 찾아와 이야기를 털어놓는 오타카라는 여성으로 인해 그 단초가 심어진 정도. 여기서 등장하는 오타카라는 여성은 자물쇠 직인의 딸로 아버지가 기묘한 인연으로 들린 저택의 자물쇠를 시작으로 오타카를 제외한 가족들이 그 기묘한 저택에 삼켜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오싹한 이야기이며 유일한 생존자인 오타카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참고로 흉가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물에서도 흔해 빠졌으면서 그것이 표현되는 모양새는 창작자의 능력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기본적으로 공포나 미스터리물에서 그려지는 흉가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거나 행방을 묘연하게 만드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르는 주체는 한결같지 않다는 느낌이라죠. 집이 문제일지 집에서 살던 사람이 문제일지.
세 번째 소설 「사련」은 처음엔 시련이란 단어로 읽었다가 내가 나중에야 단어를 잘못 읽었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하게 한자는 邪戀으로 단어 뜻만 사전에서 찾아보면 도리에 어긋난 사랑이란 뜻이 나오는데 이 단어는 처음엔 오치카를 연모하여 그녀의 약혼자를 죽인 남자의 그릇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일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설을 제대로 읽기 전 타 단편에서 주어진 정보로 인해 오치카는 마음에도 없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해서 질투심 때문에 그가 그녀의 남자를 죽였고 오치카는 그런 스토킹의 가련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이 소설 「사련」을 다 읽고 나면 살인을 저지른 마쓰타로 입장이 좀 가련하다는 게 드러납니다. 오치카를 연모한 마쓰타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오치카의 부모가 하인으로 거둬준 이이며 오치카의 가족은 그를 '가족처럼' 대했다고 하면서 실은 내면에는 선을 그어놓고 그는 엄연히 하인이며 주제 파악을 하며 살라는 의식을 심어놓았다는 게 드러나거든요. 마쓰타로도 오치카를 좋아했지만 그 처지를 잘 알아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음에도 오치카와 그의 가족이 그의 애정마저도 거의 반농담거리로 오치카의 시집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는 게 밝혀지지요.
결국 말로는 가족이라 하면서 그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흔히 열정페이 관련 일화나 사기꾼 이야기를 찾아보면 가족도 아니면서 가족애를 강요하여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것을 훈훈하게 미담인 척 꾸미며 사람을 갈취하는 경우를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정도가 달랐어도 이 오치카 가족이 한 짓이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애초에 정말 가족으로 받아줄 생각이 없으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선을 긋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마쓰타로를 양자로 받아들여 진심으로 가족으로 대하거나 하면 좋을 것을 이들의 어정쩡한 태도는 결국 피를 불렀을 뿐이죠.
물론 소설 상에서 오치카의 가족들은 선량한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들의 선행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선량함을 돋보이게 하는 데 쓰였을 뿐이라는 게 드러난 셈이거든요. 이는 오치카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녀 오시마에게 털어놓으면서도 드러나는데 오치카의 약혼자 요시스케가 마쓰타로를 모욕하는 것도 보고만 있었고 어느 정도 상황이 악화되는데 일조를 했으면서 착한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고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고요. 이 단편으로 인해 그동안 주인공인 오치카에게 가졌던 동정심이 싹 날아가 버렸는데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쳐 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 소설 「마경」은 오치카의 사정을 전해 들은 오시마가 나름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지인 오후쿠라는 여성을 초청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놀라게도 이 소설 「마경」은 다름 아닌 남매의 근친상간이 주 내용인지라 다른 단편보다 내용이 충격적인 편입니다. 소설 상에서 오후쿠의 언니와 오빠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마치 '저주'와 같단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사랑이 그릇되고 자시고를 떠나서 상당히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는 점에서 영 찜찜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왠지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렇게 자기들끼리 사랑한답시고 주위에 큰 민폐를 끼치는 커플들을 많이 본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나마 단편의 교훈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그늘에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과거의 비극은 과거의 비극이고 현재의 내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소설 속에서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오치카의 숙모인 오타미의 말로 그들의 사랑으로 인해 생겨난 애꿎은 피해자들, 입막음이나 마찬가지로 죽임당한 고용인 소스케나 남매의 망념에 씌어 살해당한 며느리 오키치처럼 독자마저 잊어버렸을 사람들을 부각시키면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 「이에나리」는 앞서 등장한 「흉가」와 이어지는 단편으로 파편처럼 뿌려진 이야기를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에나리」에서 흉가의 재앙을 막기 위해 이번 소설집에 등장한 인물들, 정확하게 오치카가 그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해원이 가능하게 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거든요. 제목인 '이에나리'는 일본 설화에 등장하는 집의 물건을 흔드는 요괴나 그 현상을 일컫는 것인데 그 이름 자체가 흉가에 스며서 사람들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가는 악령과 동시에 그 저택이 무너지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야기의 결말은 『피리술사』에서 스포일러(?) 된 것처럼 오치카의 활약으로 저택에 갇힌 영혼들이 해방이 되는데 이 저택이 원한 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거나 혹은 이젠 그 이야기마저 잊혀 텅 비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채울 사람들이 필요해 애꿎은 영혼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설화에 등장하는 '이야기 주머니 설화(참고)'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야기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그것을 들려주고 싶다는 점이며 본능적으로 인간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또한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그런 본능을 거스르거나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상당히 끔찍한 비극이라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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