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표지의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의 디자인이 어째 많이 익숙하다 싶더라니 생각난 게 제가 소장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단편집과 색은 정반대지만 표지 디자인이 같았는데 살펴봤더니 그 책과 같은 시리즈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재까지 도서관에서 발견한 현대문학 시리즈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말고도 기 드 모파상이나 몬터규 로제 제임스의 작품까지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래도 제일 재밌는 것을 꼽자면 역시 가장 처음 보게 된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집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나머지 두 편은 기대에 비해 좀 아쉬웠던 기억이 나요. 하여간 이 현대문학 시리즈 중에도 왠지 제가 좋아할 법한 소재의 소설들이 제법 있는 거 같아 이번 빌려온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전혀 아는 정보가 없으면서 빌려왔는데 단편집이고 분량도 적당하고 책의 뒤표지에서 설명하는 대로라면 20세기 서스펜스의 여제라는 수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약간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잘 모르는 작가라던가 그냥저냥 얇은 기대치에 따라 빌려온 책들이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번 단편을 읽기 시작했더니 상당히 재미가 붙어서 이틀 만에 결국 완독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유명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원작이 여기 실린 단편 소설 중의 하나이기도 하더라고요. 책에 실린 단편은 총 아홉 편으로 하나하나 짧게 리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으레 작가의 성별이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확정하게 된다면 대개 주인공의 성별도 작가를 따라가려니 하는 편견과는 다르게 - 실제로 그런 경우가 더 많이 있긴 하지만 - 여기 실린 단편의 주인공들은 그 성별이나 신분이 가지각색인 경향이 보여서 신기했습니다. 일반적인 부부나 직장인에서부터 전쟁 참전 용사와 농가의 인물까지 다양한 것이 특징인데 이들이 하나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데서 역자 해설에선 일상성과 그 일상을 깨는 데서 오는 공포라는 설명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소설 '지금 쳐다보지 마'는 책의 타이틀을 장식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첫 번째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딸을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해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온 남편입니다. 두 부부는 한 식당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쌍둥이 노파를 만나고 그들이 영매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지요. 그리고 노파로부터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남편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 기분 나쁜 예언을 듣게 되고 때마침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게 됩니다. 아내는 아들의 걱정 때문에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남은 남편은 노파들 때문에 불쾌해진 데다가 우연히 아내와 그 쌍둥이 노파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노파들 때문에 범죄에 연루된 것이 아닌가 불길해하며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하지만 웬걸 아내는 무사히 고향에 도착했단 전화를 받고 자신이 뭔가 착각을 한 것이라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예언은 어떤 식으로든 들어맞게 되는데 이 소설은 짧은 이야기지만 복선과 반전이 특징적인 점이나, 특히 자기 고집을 지나치게 부리는 사람의 경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파국을 맞게 된다는 점에 있어서 묘하게 섬뜩한 교훈을 남겨준다고 할까요.
두 번째 소설 '새' 그 유명한 히치콕 감독의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라고 작가 소개에 짤막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실은 소설을 제대로 읽기 전에 작가 소개는 대충 넘어간 감이 있어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대충 새의 습격이 주제가 된다는 점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고 책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것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한 관계로 영상에서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었는지 비교를 할 수는 없는데 다만 소설이 그려내는 기묘한 분위기나 파국과 같은 현장은 현대의 작품에서도 다시 쓰여도 문제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특이한 소설입니다. 미지의 생물 출현과 그로 인한 일상 파괴는 현대에서도 많이 쓰이는 소재이므로. 다만 여기 등장하는 주요 생물이 흔히 보는 새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농가의 평범한 가정으로 새들이 갑작스럽게 사람들을 습격하여 고립 상태가 되는데 여기서 새들이 어째서 사람들을 습격하게 되는지에 대한 결말부까지 자세한 설명은 없으며 내용도 새의 습격에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열린 결말로 놔두고 있어 이 부분은 읽는 현대 독자들로 하여금 좀 불만이 될 수는 있겠단 생각이.
세 번째 소설 '호위선'은 망령이 이끄는 유령선이라는 점 때문에 불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을 오히려 뒤집어 그 망령들의 호위를 받는 조금은 훈훈한 결말을 내놓는데요.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반영하듯 소설에선 1, 2차 대전이 주로 언급되기도 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고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이 겪은 일도 전쟁 중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습니다. 선장이 앓아눕고 주인공이 대신 배를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 공격을 받을 위기에 놓였을 때 어떤 수상쩍은 배가 나타나고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영국인이며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배를 호위해준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 배 덕택에 주인공이 탄 배는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는데 자신들을 호위해 준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그 배의 선원들이 부르던 100년도 더 된 군가나 그들이 보여준 기묘한 분위기를 통해 그들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닌 과거의 인물들이란 게 암시되며 주석에 따르면 주인공들을 호위해 준 배의 선장은 영국 해군의 영웅 허레이쇼 넬슨이란 게 언급됩니다.
네 번째 소설 '눈 깜짝할 사이'는 일종의 타임워프를 다룬 소설인데 실은 옛날 미스터리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이런 소재는 드물게 본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놀랐던 소설입니다. 게다가 타임워프되는 계기도 주인공의 교통사고가 원인이라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타임머신』과 같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들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건 장르가 SF로 분류되니 아예 이야기가 다른 경우라... 드물게 예전에 읽었던 외국의 단편에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이것은 일종의 예언이나 환시 같은 것이라 같은 소재라 하긴 그렇고 이야기 자체는 우리나라 설화에서 신선들 노는 곳을 구경 갔다 돌아오니 시간이 수십 년 지났더라 하는 내용과 많이 비슷했습니다. 홀로 딸을 키우는 과부인 주인공은 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 20년 뒤의 미래로 워프를 경험하는데 여기서 주인공이 너무 순박한 여성이라 그런 건지 자신이 미래로 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다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농락하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더군요. 그래도 결말에서 다행이랄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암시되는데 다만 미래로 가게 된 계기가 교통사고인지라 현실로 돌아온 순간 주인공의 운명은 불길하겠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이 되는 결말로 끝납니다.
다섯 번째 소설 '낯선 당신, 다시 입 맞춰 줘요'는 반전적인 요소가 또렷하고 그 반전 자체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편견을 깨는 내용이라 현대적으로도 무리 없이 먹힐 내용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 내에서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갖는 편견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부분을 풍자하는 듯한 시선이 보이기도 하고 여성들의 투표권 운운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생각해보니 여성들의 참정권을 인정받은 역사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는 게 새삼스레 알게 되더라고요. 주인공은 운 좋게도 살인마의 덫에서 빠져나가지만 다른 남자는 그러지 못하는데 이 소설은 그저 주인공이 살인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이 다가 아니라 살인마가 어째서 살인을 저지르는지도 암시되기도 하며- 물론 암시된다고 해도 납득하기는 어려운-, 내용 자체는 살인마의 무서움보다는 어쩌면 주인공에게 찾아왔을지도 모를 운명적인 사랑의 기회가 가차 없이 무너지는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단 생각이 드는데 이런 사람들이 갖는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은 마지막 소설에서 다시 되풀이된단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여섯 번째 소설 '푸른 렌즈'는 읽으면서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력을 잃고 렌즈를 삽입하여 시력을 회복하는 수술을 받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처음 수술은 무리 없이 성공하는 것처럼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전혀 예상 밖의 것들이 보이는데 바로 주변 사람들 모습이 짐승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게 된 것. 말하자면 애니 『주토피아』처럼 동물들이 인간 형태로 돌아다니는 것을 실사로 보게 된 셈인데 이런 것은 어쩌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만화 속 캐릭터로 축약된 이미지와 실제 동물의 모습은 차이가 있단 것을 파악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심지어 그 리얼함 때문에 주인공이 굉장히 공포에 질리게 되고 결국 그녀가 발작을 일으키자 렌즈가 시신경을 압박한 것이라 생각한 병원에서 새로 수술을 하게 되면서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런 장르에서 해피엔딩은 드물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소설로 그 결말까지 굉장히 참신했던 단편이었어요.
일곱 번째 소설 '성모상'은 어부의 젊은 아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로 내용이 좀 짧은 편이라 대체 어떤 반전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는 여성이 남편을 위험한 바다에서 지켜달라고 마을 교회의 성모상에게 기도를 드리며 그 기도에 회답하듯 주인공은 어떤 환영을 보게 되는데 성모 마리아가 남편을 축복한다 여기는 환영은 실제로 그것이 아니라 교회 구석에서 숨어서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의 그림자로 그 반전이라던가 내용이 현실적인데 비해 주인공이 매우 순박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 좀 안타까웠던 소설... 여덟 번째 소설 '경솔한 말'은 앞의 성모상만큼 짧은 내용의 단편으로 한 명의 여자 사기꾼에게 얽힌 불운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인데 어찌 보면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주인공 덕택에 사기꾼과 결혼 파토 난 남자는 주인공을 해고하는 게 아니라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는 내가 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아홉 번째 소설 '몬테베리타'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답게 내용도 길고 인상적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 빅터가 애나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데 친구인 빅터보다 오히려 주인공이 친구의 부인인 애나와 더 대화가 통하는 부분이라거나 서로 비슷한 심리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 전개에선 왠지 불륜의 냄새가 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내용은 그런 상투적인 전개를 벗어나 일상과 속세의 답답함과 먼지를 벗어나 초월적인 곳에 도달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데 빅터의 아내 애나는 몬테베리타라는 미지의 땅에 도착하여 그곳 여사제의 부름에 이끌려 종적을 감추고 빅터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 속에서 살다가 소식이 끊깁니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그곳에 도착하게 된 주인공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죽어가는 빅터를 만나고 계속되는 여자들의 실종으로 마을 사람들이 분노하여 몬테베리타 땅을 부수려 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미지의 땅에 접촉하여 거기서 애나를 만나 자신의 감정을 확인합니다.
어찌 보면 소설 초반의 예상대로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것이니 부도덕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분위기 자체는 그런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등장인물들 자체가 그런 속세의 것을 초월하려는 인물들로 그려지기에 오히려 안타까움이 더 묻어 나오는 감정으로 묘사되고 있고요. 애나가 도착한 그곳도 완벽한 낙원은 아니며 주인공은 친구인 빅터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 산을 내려오고 마을 사람들이 그곳을 부수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하지만 소설 프롤로그에 그런 습격에서 공격당한 인간은 나오지 않아 오히려 속세 사람들이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거나 애나를 비롯하여 미지의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나병에 걸리면서 그곳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그들의 행방 자체는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의문으로 남는 점도 그렇고 끝까지 미스터리의 한 부분을 유지하면서 소설이 끝납니다. 그래서 소설의 이야기가 환상을 간직하더라도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사람이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신비로운 여지를 남겨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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