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딱히 어떤 책을 빌리자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맘에 둔 책들이 있기야 있었지만 묘하게도 도서관에 갈 때마다 대출 중이거나 아예 책이 비치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내심 포기하고 있었고, 그 대신 연휴 동안 재밌게 읽을 만한 다른 책은 없나 찾아봤거든요. 그 와중에 도서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깨끗한 책들이 종종 보였는데 이 셜리 잭슨이라는 작가의 소설은 읽어본 적 없지만 유독 책 상태가 깨끗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분명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책인데 시리즈처럼 같은 작가의 책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여럿 나열되어 있었고 표지도 좀 섬뜩한 것이 혹시 내 취향에 맞는 책이 아닐까 싶어 뒤적거려 보았어요. 그러자 책의 맨 마지막 역자 해설이라던가 하는 글에서 ‘고딕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설명 등이 나와 흥미가 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책들 중에서 장편 소설보단 단편집을 먼저 읽을 생각을 했는데요.
그 와중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제비 뽑기』. 작가가 고딕 미스터리 계열 작가라는 점이나 제목이 가질 법한 의미라던가 문득 책을 보는 순간 이 소설은 내가 아는 어떤 내용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본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에서 어떤 에피소드를 본 적 있는데 유명세 때문에 파파라치와 사생활 침해로 괴롭힘 당하던 모 여가수의 이야기를 상당히 블랙 코미디로 묘사한 적 있었거든요. 내용이 꽤나 충격적이라 이런저런 내용을 검색해 보니 이 에피소드가 패러디한 작품이 따로 있고 그 작품의 제목이 ‘The Lottery'라는 소설이며 그 내용은 한마을에서 마을의 풍년을 위해 제비 뽑기를 통해 한 사람을 골라 제물로 바쳐 돌팔매질로 죽인다는 원작의 내용 또한 상당히 충격적인 점 때문에 절대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되었는데 문득 이 책을 꺼낸 순간 이 책의 『제비 뽑기』가 그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의 내부를 살펴보니 제 예상이 맞았다는 게 드러나더군요. 제목은 『제비 뽑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작가 소개에 실려 있는 설명에 의하면 원제는 ‘The Lottery'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책의 가장 뒤에 실려 있을 제목의 소설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내용의 충격적인 면은 이 마지막 소설이 가장 커서 오히려 앞의 소설들이 좀 밋밋하게 느껴졌을 정도였습니다. 재미난 점으로 책의 마지막 뒤편에 실린 작가의 이야기에서 이 소설이 잡지에 실렸을 때 엄청난 항의 편지를 받았을 정도라고 하던데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1948년이라는 점이나 셜리 잭슨의 다른 단편들에서도 그리듯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이 상당했을 때라는 점도 있고 책을 다 읽고 저런 부가 설명까지 읽고 나니 그 많은 항의 편지를 받았단 사실은 역시 사람들이 찔리는 게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그리는 이런 양상, 일종의 마녀사냥과 같은 모습이 비단 1948년의 모습만은 아니며 현대와도 여러 부분 겹쳐진다는 점은 좀 섬뜩한 구석이 있어요. 이번 셜리 잭슨의 단편을 읽으면 느껴지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외부인에 대한 차별, 혹은 내부적으로 가해지는 감시와 압박 등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면이 강하기 때문에...
이 셜리 잭슨의 단편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역시 제목이 가리키는 『제비뽑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소설들이 그저 그랬단 것은 아니고요. 간단하게 요약된 셜리 잭슨의 일생을 본다면 유년기에는 자신의 성격을 이해 못 하는 어머니와 갈등이 심했고, 커서는 결혼 뒤 정착한 마을에선 마을 사람들의 텃세 때문에 매우 괴로움을 느꼈다고 하며 흑인 작가인 랠프 엘리슨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하는 등 소설을 관통하는 여러 내용 중 한적한 시골에서 일어나는 외부인에 대한 감시와 압박, 보이지 않는 차별은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소설의 일면은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녹아난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대에서도 폐쇄적인 곳은 많고 차별과 배척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소설을 실감 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혹은 가까운 사람-남편이나 이웃, 혹은 자식-끼리도 제대로 진심이 오고 가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는 대화를 하는 모습이나 한 집단에 포함되지 못하고 그 겉을 맴돌아야 하는 아웃사이더와 같은 심리는 실은 책을 읽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기에 소설 자체를 특별하게 재미있게 읽은 것은 아니더라도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공감이 가는 바였습니다.
※
책을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곁들여보고 난 다음 재미난 점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공통적으로 셜리 잭슨의 단편에는 ‘제임스 해리스’라는 기묘한 존재가 사건을 더 악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모든 소설이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다시 살펴보니 사건의 중요한 인물이거나 혹은 중요한 순간에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로 이 인물이 등장하더군요.
'책 > 소설과 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리뷰 (0) | 2025.01.09 |
---|---|
『힐 하우스의 유령』 리뷰 (0) | 2025.01.08 |
『슈퍼맨 배트맨 공공의 적』 리뷰 (0) | 2025.01.06 |
『제중원』 2권 리뷰 (0) | 2025.01.05 |
『제중원』 1권 리뷰 (0) | 2025.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