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찾아가는 마을 도서관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법한 작가 셜리 잭슨의 소설 번역본을 발견하고 그중 단편집인 『제비뽑기(원제 : 더 로터리 The Lottery)』를 먼저 빌려본 바 있습니다. 이 셜리 잭슨의 단편소설 『제비뽑기』는 그의 대표작이고 다른 매체에서 훌륭하게 패러디된 것을 본 적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항의 편지를 받았다는 게 왜 그런 지 이해가 갈 정도로 그 분량은 짧음에도 내용은 충격적이었고, 솔직히 단편집이긴 하지만 그 소설 하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다른 단편들은 몇 편을 제외하면 실은 눈에 제대로 안 들어왔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작가의 소설 자체가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작가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감이 잡혔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작가의 다른 소설 현재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세 편의 책들 중 한 권은 빌려봤으니 또 다른 대표작이라는 『힐 하우스의 유령』을 빌려왔습니다. 보면 책의 해설 같은 데서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의 대표작 『샤이닝』이 이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의 설명이 있어서 흥미가 더 생기기도 했고 책의 서문에 실린 평론가의 평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이 『힐 하우스의 유령』은 『더 헌팅』이란 제목으로 1963년에 영화화되었고, 이 영화는 다시 1999년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는 언급이 나오더군요. 『더 헌팅』은 제가 재밌게 본 영화 『헌티드 힐』과 제목이 좀 비슷하기도 했고 줄거리를 찾아보면 설정도 좀 비슷한 구석이 있어 처음엔 헷갈린 영화이기도 한데 어째 평론에선 리메이크 작은 형편없다는 혹평도 있고 검색을 해보니 1999년도의 작품은 다른 공포영화인 『헌티드 힐』과는 다르게 관객들 평이 싸늘하더군요.
『힐 하우스의 유령』은 몬터규라는 학자가 초자연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유령이 출몰한다는 힐 하우스를 실험 장소로 찍어놓고 실험을 위해 주인공 세 사람을 불러들이면서 시작합니다. 실험자로 초대된 인물들은 두 여성 엘리너 벤스와 시어도라, 그리고 힐 하우스를 소유한 샌더슨가의 조카인 루크인데 이야기의 가장 중점에 있는 것은 엘리너 벤스라는 젊은 여성으로, 그녀는 처음부터 자의식이 강하다는 설정에 다른 사람과 툭 터놓고 대화를 못하는 성격으로 어릴 적 아버지 사망 이후 어머니와 언니와 살면서 집에 돌이 떨어지는 기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커서는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어야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결혼한 언니 부부에게 얹혀살면서도 나름 새로운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인물이란 게 드러나요.
반면 시어도라와 루크는 엘리너에 비하면 설명이 적고 암시가 되는 것처럼 나오는데, 시어도라는 자신이 하는 일에 거침없고 어딜 가서도 눈에 띌 법한 여성이며 루크는 갖출 것은 다 갖추었지만 숙모가 보기에는 믿음직하진 못한 청년 취급을 받는 인간입니다. 엘리너완 달리 이 둘은 딱히 어떤 초자연 현상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단지 눈에 띄거나 혹은 그 집 주인이기 때문에 실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는데 이런 것을 보면 자의식이 강하고 소외감이 강한 데다 기이한 경험을 가진 엘리너에게 뭔가 순탄치 않은 일이 생기리란 것은 금세 파악이 가능합니다. 어쨌든 엘리너는 차를 가져가면 자신들이 휴가를 가지 못한다고 반대하는 언니 내외의 다툼에도 불구하고 공동 소유인 차를 몰래 운전하고 나오면서 힐 하우스가 있는 마을에 들어서게 되지요.
엘리너는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왠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힐 하우스의 경험이 뭔가 새로운 것을 자신에게 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실험을 주도하는 몬터규 박사와 나머지 일행을 만나 처음엔 새로운 상황에 기뻐하고 특히 시어도라와의 관계는 마치 소녀 때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이내 힐 하우스에서 이상한 현상을 겪고, 특히 벽에 엘리너의 이름이 적히는 괴현상이 일어나면서 엘리너에게 고립감과 소외감이 몰려듭니다. 저번에 접한 셜리 잭슨의 단편집에서도 계속 반복되었던 주제인 어느 곳에서 속하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가 이 『힐 하우스의 유령』에서도 다시 되새겨진다고 할까요. 오히려 소설의 내용은 힐 하우스의 기묘한 사연과 기이한 현상보다는 엘리너의 이런 고립이 더 주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여성의 고립 이야기,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으나 끝내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작가의 설명에서도 나오듯 유년 시절에는 어머니와의 갈등, 커서는 남편을 따라 살게 된 마을에서 받은 배척, 그리고 서문의 평에서 잠시 언급되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충격 등 그의 삶과 많이 연관되어 보입니다. 특히 엘리너는 자신이 받지 못한 애정을 시어도라에게 얻고 싶어 하는데요. 이것은 연인 간의 사랑이기보단 가족애와 더 유사한 사랑이며 자신을 같은 집단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속감에 가까우며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나 언니에게 의탁하면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고 헛되이 썩어가는 듯 한 상황에 대한 보상이라 보입니다. 여기서 그려지는 엘리너의 심리는 새로운 삶을 위해 언니 부부에게서 독립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켜주고 받아주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결국 실험 참가자들과 골이 커진 엘리너는 힐 하우스에게 홀리게 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 ‘힐 하우스’라는 환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때쯤 되어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몬터규 박사는 강제로 엘리너를 힐 하우스 밖으로 내보내고 엘리너는 환상에 사로잡힌 채 차를 운전하다가 거대한 나무를 들이받습니다. 결말에서 딱히 묘사하진 않지만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지는 뻔하며 다른 참가자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몬터규의 연구 논문은 학계에서 무시당하며 오로지 힐 하우스만이 광기에 물든 채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면 끝납니다. 소설에는 어떤 피바람도 힐 하우스의 광기에 홀린 엘리너만을 제외하면 어떤 희생도 없어, 자극적인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다만 소외된 인간, 고립된 인간, 어디에도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경험 못한 사람의 말로를 이해한다면 섬뜩한 구석이 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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