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하권은 세이슈의 죽음을 목격하고 돌아온 요코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소설 내에서 케이키가 느꼈던 바에 의하면 내성적인 성격이라든가 궁 내의 관리들의 알력 싸움에 지쳐가는 모습 등 요코는 선대인 여왕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정작 자기 문제를 의식하고 움직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게 전권에서 언급되었는데요. 솔직히 여왕은 무능한 왕이었다지만 그 심정이 이해도 못할 게 아닌 것이 우리 현실의 역사에서 대개 군주 자리란 세습이 당연시되었고 그 때문에 후계자에겐 군주가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시키는 일이 많아 특별하게 시대적 상황이 문제가 아니었던 경우를 제외한다면 어린 군주가 왕 자리에 올라도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반면 여왕 같은 경우는 평범하게 자라고 또 평범한 삶을 살 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원치 않는데 너무 큰 것을 가지게 된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케이스가 아닐까 싶더군요.
『십이국기』 세계관에서 왕이란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상당히 랜덤하게 정해지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 악역을 맡았던 각왕 역시 자신은 왕의 그릇은 아니었고 단순히 운이 좋았다는 언급이 있던 것처럼 그릇 이상의 자리를 맡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락에 빠지는 경우 역시 소설 속에선 묘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게 눈여겨볼 점입니다. 특히 여왕과 각왕이 상당히 개성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 편인데 이것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가면서 좀 더 드라마틱해서 분명 인물 자체만으로는 좋은 평가를 줄 순 없으나 그 행적과 캐릭터성은 보는 입장에서 상당히 인상을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어쩌면 다른 암군들이 갑자기 미쳤다거나 이유 없이 실도했다는 언급만 있는 등 왜 그리됐는지는 알 수 없단 것을 보면 여왕이나 각왕은 오히려 작가가 그 심리에 대해서 공들인 게 보일 정도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까요.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하권의 컬러 삽화. 그리고 후반 명장면을 묘사한 삽화입니다.
이번 하편의 내용은 향장 쇼코와 화주후 가호의 만행을 폭로하고 그들의 죄상을 드러내기 위해 고쇼와 칸타이 일행이 반란을 일으키고 거기에 스즈와 쇼케이, 요코가 말려들면서 스케일이 커지는 내용입니다. 특히 후반 전투씬은 『십이국기』 세계관에서 외국과의 전쟁만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 실은 전쟁이나 다를 바 없이 묘사되는데 여기에 요수들이 있단 점까지 거들어 날아다니는 기수를 길들여 상공에서 공격을 하는 공행사와 같은 존재는 판타지 세계관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저런 세계관이라면 저런 것이 있을 만하다는 묘한 현실성을 부여해 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주인공 세 사람의 성장과 더불어 경동국 내의 복잡한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 소설만으로도 긴박하게 전개되는데요. 애니메이션은 여기서 놀랍게도 오리지널 캐릭터인 아사노를 얹은 것도 모자라 쇼코의 캐릭터를 굉장히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재창조까지 했는데 보통 오리지널 요소를 원작과 달리 넣을 경우 산만해지거나 이야기의 중심이 흐려지는 경우와 달리 굉장히 수월한 전개를 보이는 데다 소설의 주제까지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애니 제작진의 센스에 감탄이 나온다고 할까요? 특히 쇼코의 캐릭터 재창조는 상당히 놀라울 정도예요.
그리고 작 중 사건의 중심이 되는 척봉 사람들의 행보를 보며 쇼케이와 스즈가 자신들의 예전 행적을 겹쳐보는 것을 본다면 어쩌면 이번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편의 진짜 주제는 어떻게 사람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가를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이국기』 시리즈를 현재까지 나온 것을 전부 읽어봤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왕의 기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묘사하는 듯싶지만 좀 더 이야기들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왕이란 게 어떤 것인지 그려내는 것 말고도 각기 다른 주제를 드러낸다고 보이는데 이번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에서 척봉의 사람들은 쇼코를 미워하면서도 마치 참고 있으면 해결이 되겠거니 하는 수동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상황이 변하면서 반응이 갈리긴 해도 적극성을 띄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인공 일행이 재앙을 가져왔다 원망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바꾸고자 하는 욕망은 있었고 이것이 경국의 상황을 보고 싶어 했고 또 자신의 편을 구하고 싶었던 요코의 바람과 겹쳐서 변화가 가능했다고요. 결국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지는 말라고 이야기하는데 자기 연민이 실은 가장 발목을 잡기 마련이거든요. 이건 불행한 사람이 자기 불행을 타인에게 전파하려는 것과도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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