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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야성이 부르는 소리』 리뷰

by 0I사금 2025.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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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소설은 잭 런던의 『The Call of the Wild』입니다. 제가 리뷰한 문예출판사의 『야성의 부름』과 같은 소설이지요. 다른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지만은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그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번에도 또 빌려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책의 표지는 이번 출판사의 표지가 그동안 번역된 소설 중에서 가장 괜찮지 않나 싶어요. 잭 런던의 『The Call of the Wild』는 출판사에 따라 제목이 각각 달라지는데, 제가 가장 처음 접해본 금성출판사 청소년 문고본에서는 『야성의 절규』, 두 번째로 읽은 문예출판사에서는 『야성의 부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출판사의 소설들을 찾아보면 『야성의 외침』 같은 제목도 있고요. 아마 가장 뉘앙스가 비슷한 것이 『야성의 부름』이나 『야성의 외침』이겠지만은 전 역시 가장 먼저 접한『야성의 절규』라는 제목이 가장 맘에 들더라고요. 물론 『야성이 부르는 소리』라는 제목도 어딘가 시적이어서 나쁘진 않지만 뭔가 가슴에 콱 와 박히는 것은 『야성의 절규』라는 제목이었던 듯.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는데다, 책 자체가 빨리 읽히고 분량도 많지 않아서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밀러판사의 집에서 풍족하게 살던 튼튼한 개 벅이 정원사 때문에 썰매견으로 팔려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점차 적응하며 야성에 눈을 뜬다는 이야기지만, 읽으면서 또 새롭게 와닿는 점도 많더라고요. 초반 부분 거친 환경에서 자비심과 동정심으로 상징되는 남쪽의 문화를 버리고 야만과 죽음으로 표현되는 추운 북쪽에서 살아남는 벅의 이야기는 작가가 생전 심취했다는 적자생존/약육강식 논리라고 하지만은 존 손턴의 등장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그런 논리를 뛰어넘는 애정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 소설 속에서 상반되는 주제의식이긴 합니다만 이 초월적인 애정 관계가 손턴의 죽음으로 끊어지자마자 벅은 망설임 없이 야성의 세계를 택하고 말지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아 강자가 되는 것을 그리고 있는 거 같지만 실은 환경에 의해 점점 벅이 강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벅의 자질이 남다르다는 것이 누누이 강조되더라고요.


이를 테면 세인트 버나드종 아버지의 체구를 바탕으로 셰퍼드인 어머니의 외양을 닮아 늑대와 유사한 생김새이면서도 덩치는 늑대의 3배이며, 지나가던 사람들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털과 근육으로 계속 묘사되는 벅의 우월한 외양이라거나 거친 환경에서 점차적으로 발현되어 성장해 가는 모습 등 이미 타고난 신체적 조건에서도 벅은 남들보다 유리한 면이 있는데 타고난 근성과 자질은 태고로부터 전해진 야성의 본능이라고 묘사되는데요. 거기에다가 다른 개들보다 배로 똑똑하고 직감도 뛰어나 어떤 상황에서 죽음의 위기가 덮치는지도 파악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다른 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만약 인간으로 바꾸어본다면, 벅은 거의 천재에 가까운 존재인데, 벅이 이렇게 특출 나게 묘사되는 이유는 작가인 잭 런던이 니체의 초인사상에 물든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모 심리학 서적에서 유전과 환경의 관계를 말하면서, 유전과 환경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실은 맞물리는 것으로 환경적인 계기가 본래의 유전적 소양을 끌어낸다는 글을 본 적 있는데, 벅이 경험해야 했던 거친 환경이 오히려 벅 속에 내재되어 있던 뛰어난 유전적 요소들을 다 이끌어낸 셈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친다고 해도 벅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과는 애초에 유전적으로 다르게 설계된 존재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아마 우리가 썰매견이라 상상한다면, 북쪽의 추운 환경과 노동을 견디지 못해 금세 죽는 남쪽의 시시한 개들 정도나 되지 않을는지.... 어쨌거나 막판에 벅은 늑대 왕국을 완성하며 근방 원주민들에게 악몽과 같은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야성이 부르는 소리』에는 이 소설 말고도 이 책에는 잭 런던의 단편 소설이 두 가지가 더 실려있습니다. 하나는 추운 북쪽 밤에 혼자 나가선 안된다는 노인의 충고를 무시한 청년이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우려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불을 피우기 위하여」라는 단편과, 북쪽의 두 백인 광부 '맬러뮤트 키드'와 '프린스'가 아쿠탄 인디언족 추장의 아들 나스를 만나 그가 백인에게 빼앗긴 아내를 되찾기 위해 방랑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북쪽 땅의 오디세이아」입니다.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이 두 소설은 앞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에 못 미치지만 나름 전해주는 메시지가 독특한 소설들이었어요. 「불을 피우기 위하여」는 단순 어른이 하는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로 봐도 되겠지만요. 좀 더 들어가면 인간에게 무자비한 자연이지만 그 자연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이 의연하게 보이기도 한달까요. 인간은 죽지만 인간을 따르던 개는 다른 야영지를 찾아 목숨을 부지하러 떠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인간은 혼자 있으면 약한 존재가 맞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북쪽 땅의 오디세이아」는 빼앗긴 아내를 찾아 고생고생을 하던 나스가 겨우 아내를 찾아내지만 그녀는 이미 백인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원래의 남편을 따라가길 거부한 뒤 백인 남편의 곁에서 죽음을 맞는 결말에서 허탈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맬러뮤트 키드의 '우리의 지혜보다 더 심오하고, 우리의 정의를 넘어서는 일도 있는 거'라는 마지막 말이 묘하게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그 말이 책에 실린 다른 소설들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과연 잭 런던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얄팍한 논리가 아닌 인간의 죽음과 삶의 복잡스러움을 포착하고 있달까요. 참고로 책의 부록에 잭 런던에 관련된 설명이 실려있는데 파란만장한 잭 런던의 삶에서 성공을 가장 먼저 맛보게 해 준 것이 저 『The Call of the Wild』인데 후기 작가 설명에 의하면 역시 벅 못지않게 거친 삶을 산 사람인 듯합니다. 그런데 『The Call of the Wild』에서 중간에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자신들의 어리석음으로 파멸하는 할과 머세이디즈 남매와 머세이디즈의 남편 찰스와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작가의 자전적 요소인 듯해요. 작가 연표를 보니 젊은 시절 매형과 함께 금광을 찾아갔다가 빈털터리로 돌아왔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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