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종병기 활』은 OCN 채널에서 방영해 준 덕에 감상하게 된 영화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남이(배우 박해일 분)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당하고 여동생 자인과 함께 도망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오프닝은 한 장면이 나오면서 제목의 글자가 하나씩 나오는 독특한 방식이에요. 겨우 살아남은 두 남매는 아버지 친구의 집안에 의탁하게 되는데 외교를 모르는 자들이라는 대사가 남이의 입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남이의 집안은 광해군 쪽에 섰던 사람이고 인조반정으로 인한 피바람으로 숙청되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더군요. 영화에서 다뤄지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인조는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속의 내레이션이나 청나라 장수들의 대사를 통해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조는 알게 모르게 남이를 부각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청군을 피해 남하하여 도망친 인조와는 다르게 남이는 혼례일에 청군에 붙잡힌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대비적이라 백성을 버린 왕/가족을 지키는 백성이라는 구도를 의도한 건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상이 갑작스레 깨지는 모습은 어떤 작품이든 언제나 공포를 유발하기 마련인데요. 역적의 자식임을 알면서도 여동생의 혼례가 성사되었고 바로 그 혼례가 치러지던 날 이상한 땅의 진동과 함께 청의 기마병이 들이닥칩니다. 잔의 물이 흔들리는 장면과 같은 연출은 대개 재난 영화에서 괴수가 등장하거나 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많이 보이는 씬인데 여기선 기마병들이 대거 몰려오면서 땅이 울리는 모습으로 그 위엄을 과시합니다.
청나라 병사들은 성내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닌 올가미를 던져 짐승 끌고 가듯 인질들을 대거 끌고 가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노예로 쓰는 목적도 있고, 후에 인질교환을 하면서 얻는 이득을 노리는 것도 있는 듯. 이때 여동생 자인(배우 문채원 분)과 신랑 서군(배우 김무열 분)이 납치되는데 서군의 모친은 끌려가는 며느리를 붙잡으려다 청군에게 베이면서 매우 비극적인 장면을 보는 이들에게 각인시킵니다. 이 장면이 찡했던 이유는 역적의 자식인 주인공 남매를 거북해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가족으로 맞이해 주었기 때문인데, 이와 비슷한 가족애를 보여준 장면은 압록강 씬에서도 반복되더라고요.
여기서 청나라의 장수가 압록강 앞에서 다섯을 셀 동안 인질들에게 도망치게 해 주겠다고 하자 통역관은 진의를 눈치채고 여기서 도망치면 우리들을 죽일 생각이니 가만있으라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여 도망을 치고 통역관의 딸도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결국 통역관은 딸을 구하기 위해 청병을 막아서고 딸 대신 희생당합니다. 그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 후에 언급되진 않으나 마침 동생을 구하려 온 남이가 활을 쏘아 청병을 죽이고 그곳의 사람들을 해방시키면서 살아있을 가능성을 높여주지요.
영화상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남이의 친구들인 갑용(배우 이한위 분)과 강두(배우 김구택 분) 같은 으레 개그성 역할을 하는 인물들은 오래 살아남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사망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이 장면들이 초반 시어머니의 죽음과 통역관의 죽음처럼 슬펐달까요. 참고로 영화에서 청나라 측 인물들은 모두 만주어를 사용하는데 현재 만주어는 사어에 가깝기 때문에 『최종병기 활』에서 만주어를 활용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 영화 이후로 청나라가 등장하는 한국 사극에서 만주어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비하인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병자호란을 다루는 다른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만주어가 등장합니다.
청나라 왕자는 바로 드라마 『각시탈』과 『야한 사진관』에서 인상을 남겼던 배우 박기웅이 연기했는데 영화 정보를 검색해 봤더니 역할 이름이 '도르곤'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도르곤이 조선 땅에서 죽은 적은 없으므로 후반 그의 죽음은 영화적 허용 정도라 봐야 할 듯해요. 전 그냥 봤을 때 청나라의 가공의 왕자 정도로 생각했었어요. 또 영화의 캐릭터는 눈여겨볼 데가 많습니다. 일단 납치된 히로인 역할을 맡은 동생 자인(배우 문채원 분)의 캐릭터도 전형이나 수동성과는 거리가 있는데요.
예전에 본 타 드라마 관련 리뷰(아마 드라마 『추노』로 추정)에서 조선시대는 여성이 순종적인 시대였으니 여성을 연약하고 의존적이게 그리는 게 당연한 건데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류의 글을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일반화의 오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실제로 역사 속에서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게 자신의 생존이나 욕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싸워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다만 남성중심주의적인 시각에 의해서 폄하되는 경우가 많을 나름- 여성의 발언권이 없다고 해서 그 시대의 여성은 모두 연약했다는 공식이 성립하기는 어렵거든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능동적인 여성, 수동적인 여성, 감정적인 여성, 이성적인 여성, 연약한 여성 등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여성상이 존재해 왔으니까요.
당연히 인류의 반이 여성인 이상 여성의 이야기 역시 구전되어 오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시대를 선택하든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창작자의 재량'에 따른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 속의 자인도 약간 눈새 기질은 있을지 망정 무장의 딸임을 내세워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하거나 자신들을 쫓은 청나라 병사들을 뒤에서 내리치는 등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라고 여성이 꼭 하등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거니와 조선시대를 바탕으로 한 설화 속에서도 여성들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는 반면 현재에도 연약함을 어필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 시대니까 그랬다는 것이 더 편견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한 축으로 존재감을 가장 과시하는 인물은 바로 쥬신타(배우 류승룡 분)입니다. 왕자의 삼촌이자 청나라의 특수 정예인 니루를 이끄는 수장인 그는 침략자이긴 하더라도 반드시 '악'이라고 말하기엔 묘해서 차라리 적역이라고 칭하는 게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주인공을 위협하는 축이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악역이 맞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무게감이나, 동료애를 보면 이 사람도 나름 자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며 운명적인 상황으로 주인공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예전에 영화 『무사』를 보면서 느낀 적 있는데 노비인 주인공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은 주인공 일행을 쫓는 원나라 장수였으며 심지어 주인공을 회유하려 했지만 거부당하고 죽음을 맞지요.
즉 악인은 아니지만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주인공과 대립하게 되는 경우였는데 다만 『무사』에서 그려지는 두 축을 담당한 주인공들의 관계가 그나마 동질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어 잘만 하면 친우가 될 수 있었을 정도로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쪽 『최종병기 활』에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추격전과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며 쫓는 살벌함이 가득하며 한쪽이 한쪽을 목숨을 걸고 죽이려 하면서 결과적으로 둘 다 죽는 결말을 맞이하지요. 하여간 압도적일 정도로 포스를 보여주는 쥬신타는 제가 본 한국 영화에서 손꼽을 만한 악역 캐릭터로 꼽아도 될 듯합니다. 그 정도로 존재감이 상당하거든요.
영화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는 영화 속 특수부대나 일부 포로들의 이야기를 표현함으로써 반드시 전쟁씬은 블록버스터급으로 묘사 안 해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까요. 포로들의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전쟁의 실태를 더 각인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과적으로 주인공 남이는 자신의 동생 부부를 구해내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압록강을 배로 건너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혹여나 반전으로 시체가 움직여서 살아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까지 전개 과정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요. 마지막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나온 조선인들이 있었으나 그 수는 소수였다고 언급되면서 영화의 막이 내립니다. 예전에 봤던 다른 리뷰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글을 봤었는데 영웅이지만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영화상의 주인공의 궁술은 신적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표현하는 것은 꽤나 보편적인 가족애라는 측면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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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좀 맘에 안 드는 점을 건지자면 호랑이가 등장하여 궁지에 몰린 주인공을 구해주는 장면인데 그래픽 문제를 논하자는 게 아니라 신적인 존재가 갑작스레 출현하여 해결을 보는 것이 꼭 데우스 엑스 마키나스러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에 대한 언급도 초반에 언급은 되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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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궁금한 점이 주인공의 이름은 남이인데 동명이인으로 조선 세조 시기의 장수 남이장군이 있어서 여러 번 설화 자료를 모으면서 남이장군 설화도 확인했었는데 아무래도 모티브를 따왔다거나 한 거라도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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