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바벨의 도서관을 발견했을 때 먼저 빌려오는 기준은 제가 잘 아는 작가인가 입니다. 바벨의 도서관은 검색 결과를 찾아보니 그 전집이 총 29권에 해당되는데, 그 중 제가 다른 소설집을 몇편 읽어본 작가들의 단편집은 거의 빌려온 것 같고요. 이번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까지 빌려봤으니 나머지 시리즈들은 잭 런던 정도를 제외하면 제가 잘 모르는 작가들의 작품이 남은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책의 소재도 그렇거니와 두께도 얇은지라 읽기에 수월한 편입니다. 이번에 빌려온 바벨의 도서관은 블로그에 리뷰를 쓴 바 있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인데, 대표작인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나 「시체도둑」과 같은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덕에 이번엔 어떤 으시시한 소설이 실려있을까 기대하면서 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조금 예상 외의 작품들이 많았어요. 일단 또 다른 대표작인 「마크하임」 같은 경우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을 다루는 책들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같더라고요.
책에 실려있는 작품들은 총 네편으로 「목소리 섬」, 「병 속의 악마」, 「마크하임」, 「목이 돌아간 재닛」이라는 단편들입니다. 여기서 「목이 돌아간 재닛」은 뭔가 초자연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시체도둑』처럼 뭔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나머지 단편들 일단 잘 아는 「마크하임」을 제외하면 「목소리 섬」과 「병 속의 악마」는 제가 생각한 스티븐슨의 작품들과 달리 뭔가 우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어요. 이 두 단편은 스티븐슨의 지병 탓에 태평양 섬에서 요양을 오래한 영향이 있는 덕인지 주인공들의 고향이 하와이로 설정이 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대개 하와이 원주민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소리 섬」은 원주민 특유의 마법과 섬의 저주,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란 으시시한 소재가 어울렸으나 전반적으로 주인공 청년 케올라가 무서운 마법사인 장인 칼라마케의 덫에서 벗어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는 내용으로 그 분위기가 왠지 모험소설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말이 해피엔딩인 점도 새로웠고요.
두번째 소설인 「병 속의 악마」도 하와이가 배경으로 주인공이 한 거부인 노인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가 든 병을 싼값에 사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소설입니다. 여기서 악마의 병은 죽기 전에 자신이 그 병을 산 가격보다 싼 값에 팔아치워야 악마에게 이끌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는데, 대개 악마가 들어주는 소원이 제정신일리 없음을 보여줍니다. 소설의 전반적인 사건은 그 처치곤란의 병이 자꾸 가격이 내려가 최소단위까지 내려가버려 더 이상 자신이 산 가격보다 더 아래로 낮출 수 없게 되면서 벌어지는데요. 주인공은 아내의 충고대로 외국과 화폐단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외국사람들에게 병을 팔아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시켜 병을 대신 사주었음에도 그를 오해하여 함부로 대하는 등 정신적으로 미숙한 면모를 보이며 인간의 얄팍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아내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시켜 더 싼값에 그 병을 사오고 또 자신이 심부름꾼에서 더 싼 값을 주어 병을 되찾으려 하는데, 결말이 어찌보면 참신한 게 그 심부름을 해준 인간은 소원들어주는 물건을 왜 파느냐며 그것을 가지고 튀어버리면서 주인공 부부는 결국 악마에게 해방되어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죠.
이 「병 속의 악마」는 여러모로 제가 상상한 스티븐슨의 소설과 다른 분위기로 참신했던 소설이라고 할까요. 반면 「목이 돌아간 재닛」은 앞의 소설들 어딘가 동화적인 결말을 맞이한 「목소리 섬」이나 「병 속의 악마」라던가 사람의 양심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크하임」과 달리 으시시한 분위기가 풍기는데, 그 배경 또한 스산한 영국이나 미국의 시골마을을 연상시킵니다. 내용은 악마가 깃든 여인이라 마을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여인을 도와준 목사가 진짜 여인에게 악마가 깃든 것을 알고 충격으로 성격이 변해버린다는 줄거리로, 으레 이런 경우 사람을 핍박하는 쪽이 나쁜 쪽이고 감싸주는 목사가 옳은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라던가, 혹은 악마가 깃들었다고 믿은 쪽은 악마가 없고 오히려 몰아세우는 쪽에 악마가 있다는 반전과는 달리 사람들이 악마로 몰아세웠던 사람에게 진짜 악마가 있었다는 결말로 반전이라는 클리셰를 다시 반전시킨 독특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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