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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바벨의 도서관 : 아폴로의 눈』 리뷰

by 0I사금 202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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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가 대개 단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단 한편이나 두 편 정도의 짧은 가짓수의 소설로만 이루어진 것도 있는지라 그런 종류의 책은 엔간해선 피하고 싶고 단편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 골랐는데 이 『바벨의 도서관 : 아폴로의 눈』은 적당하게 다섯 편 정도의 소설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예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속표지 부근에 짧은 작가 설명을 보니 이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은 브라운 신부라는 주인공을 내세운 추리소설을 썼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 집에 있던 낡은 전집 중에 추리 소설들을 번역한 책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거기서 한 신부가 보물인 '푸른 십자가'를 훔치려는 대도에게 맞서 머리를 써서 그를 유인, 그를 쫓는 경찰들에게 단서를 줘서 대도도 잡고 보물도 지키는 류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그와 관련된 정보가 바로 나오는 데 바로 단편 「푸른 십자가」로써 제가 기억하는 내용이 맞다면 어린 시절에 한 편의 작품을 접하기는 했던 작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되니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이번 단편집도 흥미가 가더라고요. 거기다 이번에 실린 소설들은 마냥 흔한 추리소설 같지는 않더라고요.


첫번째 단편 「계시록의 세 기병」은 첫 장 주석에 요한계시록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나오는데 아마도 책에 실린 작가 설명에 의한다면 작가가 종교에 많이 심취했던 증거라고도 보입니다. 내용은 요한계시록의 무시무시함과는 달리 화자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낸 폰드씨라는 이웃에게서 과한 충성심이 일을 망친 사례란 것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프로이센의 그로크 사령관은 파울 페트로프스키란 유명한 폴란드 시인을 처형하기로 맘먹고 사형집행장을 전하는 기병을 보냅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왕자가 나타나 폴란드 시인을 처형하면 국제적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사형집행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집행취소를 알리는 기병을 다시 보내게 되고 이에 불복하게 된 그로크 사령관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를 다시 보내 취소를 알리는 기병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첫 번째 사형집행장을 가지고 간 기병 역시 충직한 인물인지라 뒤에 오는 취소장을 가지고 온 기병을 살해하고 계속 길을 가게 되고 그를 취소장을 가지고 가는 기병으로 오인한 그로크 사령관의 충복은 오히려 그를 살해하면서 결국 폴란드 시인은 처형되지 않고 무사히 풀려났다는 이야기지요. 처음엔 예상과  다른 이야기 -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아니라- 당황했건만 다시 읽으니 뭔가 블랙코미디스러운 점이 묻어나는 재미난 소설이었습니다.


두번째 단편 「이상한 발소리」는 바로 고대하던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시작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읽었던 소설은 여기에 없었지만 대신 새로운 재미난 소설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귀족들의 만찬이 준비된 한 호텔에서 종업원이 급사하고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브라운 신부가 찾아옵니다. 아래층에서 만찬이 계속되던 도중 귀족들의 귀한 은접시와 포크들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터지는데, 브라운 신부는 위에서 이상한 발소리에 관심이 쏠리고 결국 도둑을 잡게 되지요. 도둑이 접시를 사람들 모르게 훔쳐낸 트릭은 바로 종업원의 복식과 만찬에 초대된 귀족들의 연미복이 크게 차이가 없단 것으로 도둑이 일행에게 섞여 있을 땐 귀족들 입장에선 종업원으로 보이고, 종업원들 입장에선 초대된 귀족으로 오해하게 하면서 그들의 눈을 속여 물건을 훔쳐나갔다는 이야기였죠. 결국 도둑은 범행이 들켜 은접시들을 돌려주는데 왠지 주인공이 신부님이라 그런 건지 범인이 잘못을 인정하면 처벌은 크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범인으로 나온 플랑보는 그 덕에 다음 시리즈에선 브라운 신부의 사이드킥으로 활약하지요.


세번째 단편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앞의 범죄 행각을 다룬 소설과는 달리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입니다. 브라운 신부와 그의 사이드킥인 플랑보 - 현재는 탐정- 그리고 런던 경찰청의 크레이븐 경감은 글렌가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백작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그의 성을 찾아옵니다. 그의 성에는 백작의 곁을 지킨 귀가 멀고 정신이 이상해보이는 이스라엘 가우라는 하인만이 남아있는데 조사를 해내가던 중 브라운 신부는 글렌가일 백작이 생전 도둑질을 해온 이중적인 인물이며 그의 가문 역시 못잖게 부도덕한 짓을 많이 해왔던 것임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죽은 백작의 시체에서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알고 기겁을 하는데 글렌가일 가문의 유언과 하인 이스라엘 가우의 행동을 보고 브라운 신부는 생전 가문의 행적 때문에 사람의 정직을 믿지 않고 불신하던 백작이 이스라엘 가우라는 특이한 행동을 보이지만 정말이지 정직한 청년을 생전에 만나 그를 가문의 후계자로 점찍고 가문의 황금을 가질 권리를 남겼음을 눈치챕니다. 즉 이스라엘 가우는 주인의 유언대로 다른 값나가는 물건은 빼고 오로지 가문의 물건들에서 황금만을 벗겨냈고, 백작의 머리에선 금이빨을 빼기 위해 그것을 빼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 가우가 찾아낼 수 있게끔 내버려 둔다는 결말입니다. 으스스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묘하게 훈훈한 미담으로 끝나는 소설이지요.


네번째 단편 「아폴로의 눈」 역시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써 거액의 재산을 물려받은 두 자매 중 언니가 살해당하자 그 죽음을 조사하는 이야기입니다. 플랑보가 나름 호감을 가진 이 언니 측 여성은 꽤 당당한 여성 행세를 하고 있어도 아폴로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칼론을 따르는데, 이 칼론이란 인물은 그야말로 사기꾼으로 피해자가 눈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승강기를 조작하여 그를 추락사시킵니다. 그리고 그전에 유서를 그더러 작성케 하여 재산을 가로채려 하는데 여기서 한 명 더 사악한 인물이 개입하여 결국 재산을 얻는 것은 물거품이 되지요. 다른 사악한 인물은 바로 피해자의 여동생으로 언니가 그런 유서를 작성할 까봐 미리 만년필의 잉크를 빼서 유서 작성을 미완으로 만들고 언니가 죽자 재산을 홀랑 먹어버린다는 이야기인데, 브라운 신부는 모든 트릭과 그들의 의도를 알아챘으면서도 여기선 딱히 범인들을 응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악한 인간들은 그냥 활보하게 되는 게 묘한데, 따지고 보면 칼론의 원래 목적은 빗나갔고, 동생 쪽은 못돼먹긴 했어도 딱히 살인을 저지른 건 아니라서 그런 듯...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속 시원한 느낌에 찜찜함이 덜한 소설이었습니다. 그 뭐랄까 일 꾸민 놈 당한 놈 가로챈 놈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옛말 떠오르기 때문일까요?


다섯번째 단편 「이르슈 박사의 결투」는 작중 드레퓌스 사건이나 독일군 스파이 언급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대적 배경이 그때인가 싶은 단편입니다.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이르슈라는 저명한 프랑스 학자 이르슈 박사가 뒤보스크 대령이라는 애국자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받고 이 둘이 자신들의 결백을 위해 결투를 벌이는 일에 휘말립니다.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이르슈 박사가 진짜 스파이인지 아닌지를 추리해 내다가 뒤보스크 대령이 결투를 취소하고 도망간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데 여기서 생각지 못한 반전이 브라운 신부에 의해 드러납니다. 뒤보스크 대령과 이르슈 박사는 결투를 하기로 했으나 결코 만나지 못할 인물들이라는 게 브라운 신부 입으로 언급되는데 다름 아닌 뒤보스크 대령은 이르슈 박사가 변장한 인물이라는 것. 결국 뒤보스크 대령이 도망치는 것으로 꾸미면서 결백을 극적으로 입증한 이르슈 박사가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자신을 각각 다른 사람으로 꾸며내는 경우는 추리소설에서 많이 보이는 패턴이지만 여기선 오로지 자신의 명성을 위해 각각 다른 사람 노릇을 하며 결국 일을 꾸민 사람의 행적이 만천하에 발각되지 않고 오히려 그 목적을 이루는 결말이라는 게 좀 특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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