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새로운 바벨의 시리즈입니다. 바벨의 시리즈는 취향인 소설이 많아서 종종 빌려온다고 했는데, 실은 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서 그나마 알만하단 작가의 소설집은 거의 다 읽은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책들을 읽는 것은 제가 잘 모르는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는 셈이었는데 도서관에서 자료 검색을 통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를 찾아보니 주르륵 뜨는 저자의 이름 중 '아서 매켄'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분명 이런 이름의 작가의 책은 읽어본 기억은 없는데 다만, 몇 달 전 구매한 책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에세이집인 『공포문학의 매혹』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본 것도 같다는 기억이 나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이 책을 집어봤더니 책의 뒤표지에는 아서 매켄을 '현대 호러 판타지 장르의 선구자'라고 소개하고 있고 그 밑에 인용된 글귀에는 '고딕적' 요소들을 버리고 H.P 러브크래프트와 20세기 공포물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언급이 있었습니다. 즉, 희미한 제 기억이 맞았다는 이야기였죠.
더 궁금해지면 나중에 소장한 『공포문학의 매혹』을 다시 뒤져보는 것도 가능하고요. 책에 실린 아서 매켄의 단편들은 총 세 가지로 다른 책들에 비하면 작품의 가짓수가 좀 적은 편이라 처음 빌려왔을 땐 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책이 얇고 단편의 수도 적으니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어요. 다만 생각지도 못하게 취향에 맞는 소설책을 빌려온 셈인데 이번에 실린 소설들은 세 가지뿐이지만 흥미로운 소재이며, 러브크래프트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그 말처럼 그의 분위기와 유사한 내용의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발견은 전에 리뷰한 사키의 『바벨의 도서관 : 토버모리』와 같은 수확이라고 할까요? 만약 도서관에 자료가 더 있다면 이 두 작가의 소설은 더 찾아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단편은 「검은 인장 이야기-라이스터 스퀘어의 젊은 여성」이란 제목으로 필립스란 남성이 랠리란 여성으로부터 실종된 한 노교수의 행방에 대해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소설의 첫 부분은 랠리란 여성의 짧은 인생역정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하는 성실한 여성이었지만 어머니를 여의고 먼저 독립한 오빠에게 의지했으나 그것도 어려워진 상황에서 자살을 결심하고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그레그 교수의 만류와 그가 자기 자식들의 가정교사 자리를 그에게 알선하면서 그를 구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랠리는 후에 교수의 연구를 돕는 비서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는데 교수가 어떤 검은 인장을 얻고 연구에 몰두함에 따라 그를 돕기 위해 한 시골까지 쫓아가게 되지요. 수수께끼의 검은 인장에는 기묘한 문자들이 새겨져 있고 랠리는 교수의 행동에 조금씩 의문을 품게 되는데요. 교수는 그 마을에서 어떤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을 심부름꾼으로 쓰는데 그 소년이 내지르는 알 수 없는 언어와 방 아래 내려올 리 없는 동상이 내려온 현상 등 공포스러운 상황을 겪은 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까지 실종이 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때마침 랠리는 교수가 자신에게 남긴 유서를 발견하고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데 교수가 연구했던 것은 각국에 전해지는 요정의 설화가 실은 실존하는 어떤 종족에 대한 단서로 전승에서 보이는 호의적인 모습은 그 종족의 본래 행적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라는 사실로 판단했단 것이었죠. 전승에선 '요정'이라고 부르지만 그 존재들은 북유럽 신화나 현대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요정들과는 확연히 다르며 인간에게 호의적이라기보단 매우 두려운 존재로써 묘사됩니다. 그 마을에서 정신장애를 앓는 그 소년이 실은 그 요정 족속이 모친을 잉태시킨 결과이며 교수는 그의 몸에서 그 존재가 튀어나오는 것까지 목격했단 것을 글로 전하고 그는 그 종족을 만나기 위해 떠났고 그의 물건 몇 가지만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랠리는 그의 행방에 대해 변호사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그것을 요정 이야기로 치부, 결국 교수는 불행하게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치부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요.
두번째 단편 「하얀 가루」는 제목만 보면 어딘가 마약과 같은 물질이 떠오르게 합니다. 실은 전개되는 내용도 어찌 보면 마약에 얽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마약의 정체가 매우 충격적인 것이라는 게 나중에 밝혀집니다. 이야기는 아버지를 여읜 귀족 남매 중 누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남동생의 변화와 그가 섭취하는 하얀 가루에 의문을 품은 누나는 의사 해버든에게 사정을 설명합니다. 해버든은 자신이 처방한 약이 아니라 엉뚱한 약을 그의 남동생이 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약품의 분석을 동료에게 맡기는데 실은 그 약은 근처 구식 약제상에서 우연히 얻게 된 분말로 그 정체는 과거 악마의 연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쓰였던 약으로 사람을 쾌락에 빠지게 하되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악이 튀어나오게 하는 끔찍한 약이란 사실이 밝혀집니다. 결국 남동생은 약에 과다 중독 탓인지 끔찍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해버든에 의해 퇴치되고, 해버든은 병원을 처분한 채 영국을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충격이 컸던 탓인지 그 역시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는 쓸쓸한 구절로 소설은 마무리되지요. 보면 소설이 마약의 무서움에 대해 공포적으로 처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작품이었어요.
마지막 단편 「불타는 피라미드」 제목만 보고 혹여나 이집트 유적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푸는 작품인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며 이 소설 역시 어느 시골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을 추적하여 실체를 발견하는 내용인데 어찌 보면 앞의 단편 「검은 인장 이야기」와 여러모로 세계관이 통할 수 있다 싶은 단편입니다. 친구 사이인 본과 다이슨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본은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애니 트레버란 미모의 소녀가 실종된 사건과 더불어 부싯돌로 이루어진 이상한 표식을 발견했단 소식을 다이슨에게 전합니다. 애니의 실종은 시골 사람들이 요정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지만 범죄의 낌새가 느껴지는데 반해, 부싯돌의 흔적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질 같다가도 그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기다 그 부싯돌을 발견한 장소에선 몽골 인종의 눈과 유사한 눈이 그려지며 그것이 늘어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지요. 다이슨은 조사 끝에 부싯돌의 흔적이 근처 지형의 모양을 따라 했다는 것을 파악, 눈의 그림 숫자는 날짜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해당일에 친구 본을 데리고 가리키는 장소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난쟁이 혹은 요정- 소설 상에선 요정의 옛 이름인 '작은 인간'이란 명칭과 선사시대 살았던 투란족 전설이라고 나옵니다- 이라고 불릴 만한 기이한 종족이 실종된 소녀를 제물로 삼아 불의 피라미드 형상을 만든 뒤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공포에 질린 뒤, 진상을 파악한 다이슨의 설명과 함께 두 사람은 소녀의 실종을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음을 파악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미묘하게 이 작품은 앞의 단편 중 하나인 「검은 인장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더불어 두 개의 작품은 작가가 영국 특유의 요정 신화에 관심이 많으면서 그것을 기존의 생각이나 이미지와 다르게 상상했단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의 후반 실려있는 작가 소개에 보면 아서 매캔은 고향 웨일스의 풍경에 매혹되어 그 풍경과 자신의 소설을 엮어놓았다고 하는데요. 특이하게도 생전 그의 삶이 그다지 평탄치 못했단 이야기에 뭔가 굴곡이 있어야 공포소재가 잘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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