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다른 책들보다 얇은 두께, 아기자기한 책 디자인, 표지에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럼에도 제목은 '엄마를 미워해도 될까요?'라는 조금은 충격적인 문구인지라 이질감이 들었던 책이었습니다. 일단 책 제목만 보면 자식을 휘두르거나 비뚤어진 애정을 주는 부모 밑에서 방황하는 자식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제 예상이 맞았고, 막상 읽기 시작하니 이 책은 오히려 엔간한 심리학 서적보다 와 닿는 게 많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적인 묘사가 충분히 들어가고 또 그것을 만화의 형식을 빌려 알려주므로 직접 겪은 것이 아니라도 이해가 가능하게끔 해 주는 책이었습니다. 책에서도 한번 언급이 되긴 합니다만 '부모를 미워하다니 자식으로 도리가 아니다'라는 말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부담이 될 수 있는지, 누구나 다 화목한 가정과 좋은 부모를 가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당연한 도리 혹은 애정이란 것도 어떤 의미에선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지 않듯, 백 사람이 있으면 역시 백가지 사정이 있을 텐데 하나의 기준만을 옳다 강요하는 것도 무배려에 폭력이라는 것을 다른 의미에서 알려주는 책인 셈. 실제로 저자이자 만화 속의 주인공인 다부사 에이코 역시 부모의 정신적인 폭력 속에 방치되면서 그런 사람들의 편견과도 맞서야 했다는 사실도 빠지지 않고 묘사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 괴로운 게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 왜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부모를 닮아가는지를 깨달으면서 동시에 불우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과정도 묘사되고 있고요. 보통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기보단 주변 사람들이 오로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거나 동정해주길 바라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실은 이런 경향이야말로 에이코를 괴롭힌 부모의 방관과 학대를 이루는 원천이기도 했고요. 책에서도 직접 언급되기를 타인이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줄 수 없으며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저자의 다짐이 나오는데 에이코의 부모는 자세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고립된 성장환경을 거치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가까운 주변 사람(딸인 에이코)은 자신을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진 사람으로 보이거든요.
심리학에 대해 통달한 것은 아니나 몇 번 심리학 서적을 뒤적거리면서 그 사람의 성향과 기질을 분류한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경계선 성격장애'의 기질이 에이코의 부모 특히 어머니 쪽에서 많이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기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거야 뭐 원래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심리학 서적에서 보통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 정도가 지나친 타입들로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에이코의 모친은 자신이 좋을 때는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친절을 베풀다가 수틀리면 폭력적이다 싶을 정도로 태도가 돌변하고 자식인 에이코가 필요할 때는 냉담하다가 그녀가 원하지 않을 때에는 지나칠 정도로 간섭하는 등 독자의 시점으로 봐도 통제불능에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성격인데다 자식인 에이코를 향해서 '널 위해서 그런 것이다' 혹은 '널 사랑해서 한 건데 어떻게 날 실망시킬 수 있느냐'라는 비난을 일삼으며 죄책감을 심는 등 심리 조종자의 일면도 보이고 있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 아버지는 방관자 역할을 맡기에 상대적으로 더 나아보일 수 있으나 에이코가 부모와 거리를 두자 아버지 역시 에이코를 '부모의 애정을 외면하는 불효녀'라는 식으로 비난하며 그녀를 심적으로 통제하려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어머니와 같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기질적으로 불안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 같은 경우 타고나길 독립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부모에게 지속적으로 휘둘려서 자립이 늦춰지거나 설령 벗어나더라도 부모와 같은 사람을 만나 비슷한 환경에 처하게 되거나 그런 사람을 피하더라도 결국 부모와 기질이 같아져 애꿎은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책의 말미에 보면 에이코는 특별히 자신에게 뭘 요구하지 않는 좋은 남편을 만났고, 그 남편에게 어머니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고치기 위해 카운슬링을 받고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노력 끝에 부모의 그림자에게 벗어나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중간 과정에서 에이코가 갓 독립을 한 다음 처음 사귀게 된 남자는 좋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자신에게 의존적인 에이코의 자존감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 타입으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 그다지 질이 좋다 할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뭔 소리를 들어도 웃는 낯을 하며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데서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이 남자 역시 정신적으로 공허한 구석이 있고 상담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보이는데요. 하여간 에이코가 이 남자와의 관계를 애정으로 착각하고 지속했더라면 부모에게서 자립하는 결말은 꿈도 꿀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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