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나는 악당이 되기로 했다』는 처음부터 빌려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이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왠지 제목이 그럴싸해 보이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 책도 제목이 재밌어 보이고 책 중간을 아무렇게나 펼치자 제법 익숙한 영화의 악당들이 거론되는 것을 보고 창작물 속의 악당들을 분석하고 저자의 소신을 펼쳐가는 책이려나, 영화 좋아하니까 봐볼 만하겠다 싶은 생각으로 빌려온 거였어요. 영화 속 악당들을 분석하여 소신을 펼치는 것도 어느 정도 맞긴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책의 내용은 단순 창작물을 넘어서서 역사나 철학 분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악당에 대해서까지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책의 요지를 정리하자면, 악당이라고 규정되는 것은 당시 사회의 규범이나 인식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로 구분되고 좀 더 앞선 생각을 했던 역사적인 인물들 역시 당시 사회에서 '악당'으로 규정되어 왔다는 겁니다.
책 후반에 등장하는 당시 시대와 불화했으나 죽은 이후 그 철학이 널리 퍼지게 된 철학자들이나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여성운동가들이 그 예. 책에 의하면 악당은 인간의 욕망과 행복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 솔직하게 살아가는 인간미를 갖춘 인물일 수 있고 그에 반해 영웅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기에 특별한 사랑이 없고 욕망을 자제해야 하는 인간미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수많은 창작물들이 그러하지만 영웅이 되기 위해선 많은 걸 포기해야 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본질적인 면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반면 악당은 사회의 편견과 소외 속에서 자라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권리와 욕망을 부르짖는 것이 그 사회에서 악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악당이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거 같은데 수많은 창작물에서의 악당은 욕망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그림자를 맘껏 투영할 수 있는 대리만족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영웅을 다루는 창작물들을 보는 이유는 이 악당의 매력 때문이며 서사에 대해 다루는 책에서도 중요하게 나오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을 위협하는 적대적 존재로서 악당들은 그만큼 중요한 존재이고, 주인공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과 개성, 힘 역시 치밀하게 설정되어야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고 볼 수 있더군요. 당연한 소리지만 악당들이 너무 힘이 없거나 쉽게 지거나 너무 간단히 주인공에게 설득된다거나 하면 이야기의 맥은 빠져버리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하는데 이는 그만큼 주인공 못지않게 적대자의 설정 또한 중요한 일임을 알려주는 것이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도 권선징악을 쫓고 악의 승리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악당에게 몰입하고 그의 매력에 빠져들어 대리만족하면서도 극상에서 악당의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요.
오히려 악당이 멋있다고 해도 막판에 악이 승리하면 몰입하면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것이 이건 원래 사람들이 가진 이중적인 심리가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요. 동시에 악당의 처참한 최후와 몰락을 바라는 건 역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악당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 거의 역사적, 사회적인 악당을 고찰하는데 급진적인 인물들이 당시 사회와 맞지 않아 악당으로 규정된 케이스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악의 평범성이 아닐까 싶어요. 중 후반쯤에도 사람들도 누구나 악당이 될 수 있음을 '악의 평범성'을 다룬 유명한 실험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도 적당한 조건과 상황이 되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악당의 기질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맞는 말 같은데, 앞서 언급한 창작물의 악당을 찬양하다가도 그의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심리도 그렇거니와 전체적인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악행은 눈감아줄 수 있다거나, 혹은 능력이 있는 사람은 뭔 짓을 해도 된다면 그에 공감하고 나도 그럴 만하면 그렇게 한다라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많이 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악에 공감하는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렇게 복잡하게 되어먹은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물론 그래도 사회는 법대로 굴러가는 게 안정을 위해서 좋겠지만. 모든 인간이 도전하는, 혹은 일탈하는 악당이 되기도 힘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상징이 되는 악당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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