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권 리뷰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오자마자 당일에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는데, 고려말의 혼란기에서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그 혼란을 잠재우는 과정이 어땠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나갔달까요. 고대하던 왕자의 난이 드디어 벌어졌는데, 주역은 단연 태종 '이방원'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만화 전반의 주인공은 정도전과 그와 대립할 하륜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 지정 미스로 인해 벌어진 부자들 사이의 골에서 정도전과 하륜은 자신들의 입지를 쌓아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개국에 공이 큰 전처의 아들들을 외면하고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으면서 쟁투의 씨앗이 뿌려졌는데, 후계자 문제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피를 볼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태조는 결국 피를 보았구요. 간간히 중간에 등장하는 명나라의 홍무제 또한 그런 후계자 문제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여 어마어마한 공신숙청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후계자 지정이 중대한 문제임에도 이성계가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만화에서 그도 그럴만한 설명을 해주는데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에 비하면 엄청난 연하(무려 21세)라 총애를 받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 당대만 하더라도 적자와 서자가 차별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적서차별이 당연시되기 시작한 것은 개국초부터 이런 삐걱거림을 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전권에서도 흔히 벌어진 일이지만 한때 동문수학했던 절친한 이들이 정치에 몸담으면서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갈라지는 경우가 흔한데 이번 정도전과 하륜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어찌 보면 전반의 주역은 정도전 원톱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는데, 심지어 명나라의 홍무제 주원장마저 정도전을 위협으로 여겨 끊임없이 조선에 압박을 가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당시 명나라도 개국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외로 혼란이 있었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이라고 거대한 땅을 온전히 다 차지한 것이 아니라 북쪽에는 원나라를 계승한 북원 세력이, 만주일대엔 여진(훗날의 청) 세력이 존재했고 그들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
여기서 조선을 공고히 할 체제와 군사력을 기르던 정도전은 늘 눈엣가시였으므로 주원장은 그들을 압박했고 이는 종종 도리어 조선 내의 이방원세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기까지 합니다. 하나의 권력집단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외부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다른 세력을 이용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까요. 더불어 참고로 설명하기를 조선의 사대 정책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강한 나라를 단순 섬기는 것이 아닌 오히려 약자 입장에서 그들을 이용하는 측면 또한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자의 난으로 숙청당한 정도전은 개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면서도 조선시대 내내 금기시된 인물인데 그가 신원된 것은 바로 흥선대원군 때라는 겁니다.
조선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그 시대의 끄트머리에 와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는 거죠.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은 이방원 측의 승리로 끝나는데,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는 데서는 그냥 맨눈으로 봐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초반에 실록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면서 생기는 의아점을 후대의 해석과 다른 기록들을 통해 해석하여 정도전 일파를 계획적으로 제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놀랍게도 2차 왕자의 난에서 넷째 방간이 난을 일으키는 것 또한 왕좌에 한층 더 빨리 올라서기 위한 방원의 유도책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지요.
인상적인 인물은 태조의 첫째 아들 진안군 방우인데 일찍 퇴장하므로 큰 비중은 없고 나오는 컷도 한정되어 있습니다만 술을 좋아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데, 논공행상에서 제외된 형제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와중에 '술이나 마시자'며 태평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조선시대를 다룬 소설에서 방우가 세자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반발하기 위해서였다고 각색이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비극적으로 각색할 필요 없이 이 만화에 그려진 대로라면 정말 한 세상 뜻대로 살고 싶고, 그렇게 살다죽은 인물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적어도 둘째인 방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살얼음판 걷듯이 한동안 버텨야 했거든요.
'책 > 소설과 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권 리뷰 (0) | 2025.05.29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리뷰 (0) | 2025.05.27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 리뷰 (0) | 2025.05.25 |
『아Q정전』 리뷰 (0) | 2025.05.24 |
『지문사냥꾼』 리뷰 (0) | 2025.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