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자료실이 아닌데도 예쁘고 섬세한 삽화가 많이 들어간 동화책이 프랑스 소설 책장에 꽂혀 있어서 조금 의아했는데 읽고 나니 이 책이 왜 어린이들이 볼 만한 곳에 없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흔히 동화하면 독일의 그림형제와 덴마크의 안데르센을 떠올리는데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들 중에 그림동화나 안데르센 동화에 속하지 않는 페로의 동화들도 상당수 있고 실은 저도 예전에 고전이나 구전설화를 유머러스하게 분석한『뜨끔뜨끔 동화 뜯어보기』를 보고 나서야 페로란 작가도 동화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상 유럽 동화들은 동양의 그것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따지고 보면 그림동화와 구성이나 분위기가 겹치는 것도 있는데 적절히 각색한다 하더라도 의외로 수위나 잔혹함에 있어서는 페로의 동화나 그림 형제의 동화나 막상막하 같더군요.
첫 번째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 이야기는 흔히 알려진 디즈니 버전 하고는 딴판으로 제가 어린 시절 낡은 책으로 읽은 것이 이 『페로동화집』에 실린 내용과 유사한데 공주의 탄생일에 푸대접을 받은 마녀가 분풀이로 저주를 걸고 백 년 동안 공주가 잠들자 왕자가 와서 구해준다는 건 다 아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이후 왕자와의 만남이 실제 구전에서는 노골적인데 왕자가 공주가 자는 사이에 그를 강간하여 임신시키고 공주는 잠자는 동안 두 아이를 출산하며 두 아이 중 아들이 배가 고파 그의 손가락을 빨다가 가시가 빠져나와 공주가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나마 페로동화 버전에서는 이 부분은 각색되어 공주를 잠에서 깨게 한 뒤 사랑을 나눴다고 나옵니다.
어린애들이 보는 이야기에는 성적인 부분만 각색하면 된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후반 내용은 더 오싹하게 전개되는데 왕자의 모친인 대비 쪽이 식인귀의 핏줄이 흐르는 여자인지라 전담요리사에게 각각 손자와 손녀, 며느리를 죽여 요리하라고 명령하지요. 이 부분은 제가 낡은 책 버전으로 읽은 것과 똑같습니다. 요리사는 양심상 그럴 수 없어서 명령이 내려질 때마다 공주와 자식들을 숨기고 새끼양, 새끼염소, 암사슴요리로 대체하여 속입니다. 하지만 오두막에 숨겨진 아이들이 떼쓰는 소리 때문에 모든 사실이 탄로 나고 분노한 대비는 커다란 통에 독사들을 다량 집어넣어 자신을 속인 요리사와 그 가족,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집어넣어 죽이려 합니다.
그때 전쟁에 나갔던 왕이 돌아오자 변명할 거리가 없던 대비가 스스로 그 통에 뛰어들어 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결론. 예전에 읽은 키류 미사오의 각색된 동화에서는 비극의 씨앗이 공주가 백 년 전 사람이라 왕자와 세대차이가 심해서였지만 굳이 잔혹동화로 만들 필요 없이 이 동화는 소름 끼치는 요소가 가득한 이야기예요. 게다가 대비가 계모라던가 하는 이야기가 없으므로 왕자의 친모일 가능성이 높은데 식인귀 행각을 벌인 어머니를 둔 아들이 과연 멀쩡할까 하는 생각도. 뭐 동화는 그런 것 없이 해피엔딩이긴 합니다. 근데 모든 동화를 통틀어 이 이야기가 제일 강도가 세긴 합니다.
두번째 동화는 「빨간 두건」인데 도대체 어린 시절에 제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는데 이 『페로동화집』도 제가 어릴 적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결말이 납니다. 이 『페로동화집』의 「빨간 두건」은 흔히 알려진 빨간 모자 이야기랑 다르게 소녀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는 걸로 끝납니다. 어린 시절에도 충격이 꽤 컸었는데 왜냐면 다른 버전의 동화책에서 사냥꾼이 나타나 늑대 뱃속에 있는 할머니와 빨간 모자를 꺼내고 그 대신 돌을 집어넣어 늑대를 죽이게 했다는 결말이 버젓이 나와있었거든요. 잔혹동화가 따로 필요 없는 찜찜한 결말이라 그 책을 매우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원래 『페로동화집』에서도 이런 내용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요.
세 번째 「당나귀 가죽」을 보면 슬슬 아시겠지만 『페로동화집』은 일반적인 동화를 생각하면 안 될 거 같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동화원전을 다룬 일본만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그림동화』라는 만화책에서도 근친상간이 원래 내용이다라고 보여준 적 있어서 그나마 충격이 덜했어요. 그 만화버전에서는 아예 왕비를 잃은 왕하고 왕의 딸인 공주가 이어지는데 여기선 부친의 청혼을 거부하기 위해 공주가 황금을 얻어주는 당나귀의 가죽을 요구합니다. 왕이 망설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죽을 선물하자 기겁한 공주는 드레스 여러 벌을 챙기고 가죽을 몸에 쓴 채 옆나라로 도망갑니다.
근처 오두막에 숨어 살던 공주는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못생긴 것처럼 위장(암만 더럽게 만들어도 이것이 가능한가 싶지만)하는데 그가 드레스를 입은 걸 그 나라의 왕자가 발견하고 상사병에 빠집니다. 왕자는 자신의 모친에게 당나귀 가죽 처녀가 만든 요리를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고 당나귀 가죽 처녀는 요리 안에 반지를 넣는데 이 반지의 주인을 찾아 왕자가 찾아오자 공주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요. 결국 공주와 왕자는 결혼하고 공주에게 청혼한 정신 빠진 아버지 왕도 시간이 흘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주와 화해했다는 굉장히 작위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반면 네 번째 「푸른 수염」 이야기는 굳이 각색 없이 잔혹동화스런 면모를 보이는데 남편이 가지 말란 빈방에는 전처의 시체들이 있고 현재 부인마저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오빠들이 찾아와 푸른 수염을 살해하여 동생을 구원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재미나게도 가족들의 화의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부인은 언니가 시집갈 때도 지참금을 주고 오빠들도 지원해 주었다는 결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다섯 번째 「엄지동자」는 독일 쪽 민담인 '헨젤과 그레텔'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동화더군요. 일곱 형제 중 가장 체구가 작은 막내 엄지동자가 굶주림 때문에 형제들과 함께 숲에 버려집니다. 처음엔 작은 돌을 뿌려 집에 돌아왔으나 두 번째 버려질 땐 문을 잠그는 바람에 돌을 줍지 못하고 빵조각으로 대신하지만 새들이 먹어버리는 것도 헨젤과 그레텔과 같아요. 하지만 엄지동자와 형제들이 만난 것은 과자집의 마녀가 아니라 식인귀의 집이었고 식인귀에게 붙들린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식인귀의 딸들이 쓴 금관과 형제들의 모자를 바꾸어 도망칩니다.
딸들이 대신 죽어버리자 노한 식인귀가 형제들을 쫓는데 그가 피곤하여 잠든 사이 그의 칠십리 가는 장화를 훔친 엄지동자가 식인귀의 부인에게 남편이 도적에게 붙들려 몸값이 필요하다고 속인 뒤 보물을 앗아가고 형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잘 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예요. 여기서 불쌍하게 된 것은 식인귀의 아내로 나름 엄지동자 형제들을 보살펴줬는데 딸들과 보물을 잃게 되었거든요. 책에 실린 다른 결말에서는 엄지동자가 칠십리 가는 장화를 신고 궁으로 가서 군대의 사정을 알리고 군인들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주는 일을 해서 돈을 번 뒤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섯 번째 「장화 신은 고양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딱히 다른 이야기는 없어 큰 감흥은 없어요. 일곱 번째 동화 「신데렐라와 작은 구두」는 그림동화의 '재투성이'와 유사한 구도를 가지만, 차이점은 새언니들이 유리구두를 신겠다고 발가락과 발꿈치를 잘라내는 이야기나 신데렐라의 결혼식에 그녀들이 두 눈을 새들이 쪼았다는 흠칫한 이야기 없이 여기선 팔자 피게 된 신데렐라가 대인배가 되어 계모와 언니들을 용서하고 언니들을 좋은 곳에 시집도 보냈다는 훈훈한 결말입니다.
여덟 번째 「요정 이야기」는 꽤 퀄리티 좋은 그림책으로 본 적 있어서 기억하는 동화입니다. 어머니와 두 딸이 사는 집이 나오는데 첫째 딸은 어머니를 닮아 못된 성격이지만 둘째 딸은 매우 착한 성품이라 어머니와 언니가 그를 구박합니다. 둘째가 물을 길어 샘에 갔을 때 요정이 한 초라한 아주머니로 변신하여 물 한잔을 부탁하자 그를 가엾게 여긴 둘째가 정성스럽게 물을 건네주고 요정은 축복으로 둘째 딸이 말할 때마다 꽃과 보석이 튀어나오게 해 줍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첫째 딸도 샘으로 보내지만 첫째 딸은 귀부인으로 변신한 요정이 물 한잔을 요구하자 무례하게 거절하고 요정은 그에게 말할 때마다 뱀과 두꺼비가 튀어나오는 저주를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둘째 탓이라 생각한 집에서는 둘째를 쫓아내고 숲에서 울고 있는 둘째를 본 왕자가 사정을 묻자 대답하는 그의 입에서 보석과 꽃들이 튀어나옵니다. 왕자는 둘째를 데리고 가서 부인으로 삼는데 아무래도 보석에 혹한 거 같다는 생각은 덤. 그런데 어머니가 바보인 게 첫째는 그냥 말을 못 하게 하고 둘째는 그대로 뒀으면 살림이 폈을 텐데 말이지요. 애꿎은 첫째는 집에서 쫓겨나 숲에서 쓸쓸하게 죽고 마는 결말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네요.
아홉 번째 「세 가지 소원」은 가난하게 사는 것에 넋두리를 하던 나무꾼 앞에 요정이 아니라 주피터 신이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나무꾼은 신중하게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식사를 하던 중 늘 소시지를 구워 먹고 싶다고 말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소시지가 엄청 늘어나서 앞으로 식사걱정은 없을 거 같은데 부인이 허투루 소원을 낭비했다고 타박하자 화가 난 나머지 소시지가 그 코에 붙으라는 말을 하고 맙니다. 그게 두 번째 소원이 되어버리자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소시지가 떨어지라는 소원을 빌면서 종결되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예요.
실은 이 동화는 어릴 적에 각각 다른 버전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어떤 동화책에서는 기다란 소시지를 쥐들이 끌고 가는 바람에 부인의 코까지 당기느라 어쩔 수 없이 소시지를 떼어달라고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버전에서는 세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던 농부가 타고 가던 말이 너무 빌빌거려서 그냥 콱 죽어버리라고 욕을 하자 진짜 말이 죽어버리고, 죽은 말대신 등자를 싣고 가다가 짜증이 나서 부인이 이 등자에나 달라붙으라 욕을 하자 진짜 그렇게 되어버리고 결국 부인과 등자를 분리하기 위해 마지막 소원까지 써버린다는 내용이었어요.
마지막 이야기 「고수머리 리케」는 구전 민담을 채록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페로의 창작물이라고 나와있는데 추하지만 현명한 왕자 고수머리 리케가 얼굴은 이쁘지만 머리가 나쁜 공주에게 자신의 현명함을 나눠주고 그 대가로 공와 결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는 처음에 거부하지만 왕자는 사랑을 받으면 자신또한 아름다워진다고 이야기를 하고 공주의 눈에 못생긴 왕자가 멋진 왕자로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좀 읽다 보면 생뚱맞은 것이 공주보다 현명하지만 못생긴 여동생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안 나오므로 도대체 여동생 이야기는 왜 언급되었는지 모르겠단 사실입니다.
마지막 해설집에는 작가인 페로의 삶에 대해 약간 언급되는데요. 페로는 17세기말 사람으로 당시 살롱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옛이야기를 되살리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 페로가 이야기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일찍 아내를 잃고 자식들을 돌봐야 했는데, 이런 개인사또한 페로가 동화 집필을 할 수 있었던 계기기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보다 백 년 뒤에 나왔다던 그림동화가 독일의 언어적 문화적 통일을 증명하려던 어느 정도 정치적인 목적을 가졌다던 데 비해서 페로의 동화는 교육에 더 목적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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