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일본 추리 소설가나 공포 소설가들 정보를 찾다가 기리노 나쓰오에 대해 접하고 그 소설 세계에 흥미가 생겨 도서관에서 몇 번 책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읽게 된 것이 『그로테스크』라던가 『아임 소리 마마』라던가 하는 책들인데 이 책들은 소재도 소재지만 소설이 이끌고 가는 진득한 분위기랄까 상당히 감당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데도 흡입력이 있어서 읽으면 찜찜함은 한가득 남으면서도 그래도 몰입하고 마는 게 특징이라고 할까요? 게 중 어떤 소설은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중반에서 포기하고 만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일단 이 작가의 소설들을 재밌게 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대개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 종류가 몇 가지 안 되는지라 더 이상 도서관에 없나 했는데 최근 추리 소설 관련으로 또 찾아보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 작가의 소설이 나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국 작가라 그런 건지 몰라도 이름을 표기할 때 종류가 여러 가지인지 대개 황금가지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땐 ‘기리노 나쓰오’라고 한글 표기되어 있던 데 반해 이번에 발견한 산성미디어의 소설에서는 ‘키리노 나츠오’라고 표기되어 있어 도서관 자료 검색으로는 다 나오지 않았던 모양.
하여간 다시금 일본 추리 소설들이 생각나서 기왕이면 익숙한 작가 것으로 찾자 하면서 선택한 것이 이번 『부드러운 볼』입니다. 제목만 보면 근래 읽은 『다마모에』처럼 뭔가 서정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이지만 그 소설이 그리는 모습은 다른 작품들 못지않게 충격적인데 애초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이나 정보를 찾았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게 말이죠. 아예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주인공 카스미의 불륜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남자(상간남)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자식을 버려도 좋다’라는 구절이 대놓고 나와 그 적나라함에 놀랐다고 해야 할까요.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 구절은 솔직히 좀 충격이라 얼떨떨했는데, 솔직히 만약 자신의 부모가 저런 생각을 한다면 자식 입장에서 세상의 반이 무너지는 기분이 느껴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그런 상황 설정 자체가 좀 놀랐다고 할까요.
소설은 여자가 그런 일탈을 벌인 순간 벌이라도 되는 양 그런 사건이 벌어져 내용이 진행되는 것 때문에 충격적인 것도 있겠지만, 읽다 보면 어느샌가 아이가 사라진 사건은 뒤로 한 채 그 사건에 얽힌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읽다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카스미나 그와 불륜을 저지른 남자인 이시야마는 참 읽을수록 정이 안 가는 주인공들이란 생각이 드는데, 일단 각각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고 자식들도 있으면서 일탈하고 싶은 욕망에 몸을 맡기고 가족이 같이 휴가를 왔을 때 대담하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라거나 둘 다 자식과 배우자를 버려도 좋으니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등등 애초에 불륜이라는 전제가 끼어 있으니 서로 죽네 마네 사랑한다고 해도 곱게 봐줄 수도 없을뿐더러 소설은 철저하게 이 둘의 심리를 바닥까지 캐내고 있는 바람에 이 둘의 애정 행각이 애처롭게 맺어지지 못한 비극이라고 하면 코웃음 나올 소리라는 게 정신적으로 공허한 두 인간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종의 탈출구로 이용하는 것이 빤히 보이거든요.
일단 두 사람 다 외모가 준수하다거나 자유로움을 갈망한다거나 하는 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에 있다면 그 속을 모르는 이상 사람들이 매력 있다 느낄 인간들일지 모르지만 소설에선 그런 것 없이 이 둘의 속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캐내므로 그들의 욕망을 진저리 치게 자세하게 묘사해 주느라 이 둘의 애정 이야기만 나오면 소설을 읽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오히려 유카의 실종 사건이 전면에 나설 때마다 분위기가 환기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애초에 카스미는 고향 홋카이도의 갑갑함이 싫어 부모를 버리고 일방적으로 집을 나왔고, 도쿄에서는 생존을 위한 도구로 남편을 택한 데다, 그 남편과의 생활이 또 ‘고향’처럼 갑갑함을 느끼게 되자 하나의 탈출구로 이시야마를 택했다는 게 드러납니다. 극 중에서 카스미는 생존력이 강하다고 설명되지만 정작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고자 누군가를 이용하고 있고 불륜남인 이시야마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동물로 보고 있어 그것을 자신이 길들이고 싶다는 욕망, 말하자면 옛날 권력자들이 손에 넣기 힘든 미녀를 애완동물처럼 차지하는 그런 심리로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까요. 그래서 만약 이 둘이 맺어졌다 한들 이 두 사람 성격 상 또 다른 탈출구를 만들었을 게 뻔히 보이더군요.
다행히도 이 둘이 맺어지지 못한 이유는 카스미의 큰딸인 유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인데, 이 와중에 이 둘의 불륜 사실이 드러나 두 사람은 각각의 배우자인 미치히로와 노리코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작 중에선 상당히 무매력으로 주인공들에게 여겨지는 인물들이나 현실에 있다면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게 이롭다 할 정도로 이 둘은 현실적이고 냉정한 타입들인데 미치히로는 그야말로 좋은 남편이지만 그런 남자도 정신적으로 공허한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인생이 굴곡이 지는지를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아내를 끝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것도 아이러니. 반면 이시야마의 아내 노리코는 더 냉철한 지라 어느 정도 배반에 충격을 받는 듯하면서도 이시야마와의 관계를 빨리 끊어버림으로 어느 정도 보복과 함께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인물입니다. 솔직히 이시야마에게 의도적으로 상처주는 노리코의 모습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통쾌할 정도였는데 표면상으로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카스미나 이시야마보단 오히려 노리코가 극 중 주인공으로 부각되지 않으면서 그 욕망이 질척하게 그려지지 않아,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죽음이 코앞을 두고 있어서인지 욕망 부분이 드러나지 않는 형사 우츠미와 함께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인물이었어요.
독특하게 소설의 중반부터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오게 되는 형사 우츠미는 집안의 유전병인 위암이 발발하여 이제 살날이 1년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가 형사를 직업으로 택한 것도 사회 정의나 질서 수호라기보단 오히려 남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공격하거나 남들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좀 더 파고들면 그 심보가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로 보이긴 하지만 카스미와 이시야마의 질척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드라이하다고 여길 정도로 냉정한 우츠미 쪽 파트가 읽기 수월했는데 기질적으로 봤을 때 카스미완 많이 다른 그가 유카를 찾게 된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사람이 바뀌는 그런 것이 아니라 냉정한 그라도 누군가에서 죽기 전 위로를 받고 싶고 그런 인물로서 이젠 생사조차 알 수 없고 남들조차 포기해 버린 딸의 행방을 찾는 카스미가 적격이라고 생각해서였다는 게 드러납니다. 거기다가 워낙 야망이 큰 인물이라 사건을 맡을수록 자신의 위치가 공고해진다는 생각을 하고 산지라 플러스로 유카의 사건을 자신이 맡았다면 자신이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도 있었고요. 따지고 보면 욕망에 몸부림치는 카스미나 이시야마에 비한다면 우츠미 쪽이 오히려 더 무서운 타입일 수 있으나 죽음을 앞둔 우츠미의 절박함이 많이 부각되는지라 우츠미의 생전 악의가 함께 그려지더라도 결국엔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고, 우츠미의 죽어가는 상황을 보면서 카스미 역시 자신을 위로해 줄 인물은 우츠미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스미와 우츠미 사이에서 막판에 무슨 로맨스 따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요, 약간 질척인 분위기가 나오긴 합니다만 남녀 간의 일반적인 애정 구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분위기. 사건의 현장에서 의심 가는 곳까지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이 둘은 유카의 행방과 범인일지 모르는 인물들을 찾아가고 심지어 유카가 어떤 식으로 납치되었거나 죽었는지 환영으로 리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유카가 범인으로 의심 가는 인물들에게 살해당하는 혹은 납치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독자 입장에선 드디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려나 싶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주인공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환영이라는 것이 밝혀져 좀 허탈하기까지 했는데, 끝끝내 유카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소설에선 자세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가의 다른 작품인 『그로테스크』에서도 ‘가즈에’를 죽인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그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오히려 그 사건에 얽혀든 인간들의 심리와 악의에 대해 집요하게 밝혀냈던 것을 본다면 말이지요, 이런 것이 작가의 방식인가 싶었습니다. 결국 우츠미의 죽음으로 인해 홀로 남겨진 카스미는 이젠 어떤 탈출구도 압박도 없지만 살아갈 결심을 하는 소설의 그동안의 전개에 비하면 성장이라 할지 나름 훈훈한(?) 결말을 맺기는 합니다만. 다만 소설의 에필로그 유카 시점의 이야기를 본다면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남성인 것은 확실하고 죽은 것은 확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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