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새삼스레 제가 리뷰를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읽어 보니 역시 명작의 힘이란 이런 데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지만요. 어릴 적에 있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다시 읽는 건데도 목이 멘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있으니 좀 냉정한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밖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읽었을 때에는 자전소설이라는 것만 알았지 소설가에 대해 관심은 없었는데 작가의 이름이 '주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로스'이고 브라질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전 여태까지 이 소설의 배경이 브라질의 작은 마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째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인디언 출신이었나 하는 의문이 이제야 해소되었다지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다섯 살 소년의 성장과 비극에 관련된 이야기지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어른의 시각으로 되살린 것이긴 하지만 당시 어렸던 저는 물론, 저랑 같은 급우들까지도 이 책이 학교 도서실에 들어왔을 당시 열광했다는 것은 작가가 그만큼 어린아이의 시점을 충분히 확보한 것이며 이건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봐야될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느낀 점을 말하라 하면 제목 속의 오렌지 나무인 '밍기뉴'와 어린 소년 제제의 교감이나 어린아이의 순수한 동심에 치중하는 거 같은데 제가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가요, 저는 좀 더 암울한 쪽으로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네요. 이 책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가난과 폭력을 말이죠.
소설 속 화자인 제제는 장난끼가 심하고 상당히 조숙한 아이지만은 그런 점을 제외한다면 또래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으며 의외로 섬세한 구석을 가지고 있어 어린 동생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어 하고 아이들에게 외면받는 담임선생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 하고 왕따를 받는 흑인 소녀를 가엾게 여겨 빵을 나눠먹는 등 사랑스러운 면모를 보입니다. 제제의 지나친 장난은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특유의 심리일 수 있는데 에드문드 아저씨나 쎄실리아 빠임 선생, 그리고 후반에 등장하는 뽀르뚜가(마누엘 발라다리스)의 충분한 애정과 관심 속에선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의 긍정적인 면모가 더 드러나지요. 행동교정 프로그램에 나온 아이들 중에도 제제와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이 여럿 있던데 그 상황과 비교하면 제제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제제를 둘러싼 상황에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더 문제. 어쩌면 가난한 아이들이 혹은 가난을 일찍 경험한 아이들이 빨리 철이 드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소설 상에선 제제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두번의 학대가 등장하는데 그 폭력적인 상황의 일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빈곤과 가난에 시달려 스트레스에 쩌든 사회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요. 이 두 건의 폭력이 제제가 다섯 살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직간접적인 요인이 됩니다. 하지만 제제의 가족이 처한 빈곤은 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치부하기에 힘든 구조적인 문제라는 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엿보이고 있고 제제 스스로도 어린아이의 시점으로나마 그것을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빈곤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상당한 압박을 주기 때문에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하기 쉬운데, 제제의 가족들은 그것을 제제의 악마(이런 단어 자체를 아이에게 노골적으로 갖다 붙이는 것도 학대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지만)적인 성격 탓으로 은연중에 돌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이 잘못된 것을 그나마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셋째 누나인 글로리아뿐이지요.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화목한 가정이란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할 뿐으로 실제로 일에 치여서는 가족들이 얼굴 맞대기도 힘들고 대화도 어려워지기 마련이니... 사회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계층마다 존재하는 '환상'부터 박살내야 할 필요성부터 느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제제가 부성의 대상을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닌 마누엘 발라다리스(일명 뽀르뚜가)에게서 찾은 점인데, 소설의 큰 축은 이 뽀르뚜가와 제제 사이의 애정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제제는 가족들 사이에 그다지 인간다운 대접을 경험하지 못했고 뽀르뚜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제제의 집안에 흐르는 불합리한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던 애정이었죠. 객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이런 학대와 가정폭력 현상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제의 부모나 가족이 제제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폭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며 환경의 변화나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들 행동을 교정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뽀르뚜가를 제2의 아버지처럼 여기며 그 우정이 지속되었다면 제제가 가족들 사이에서 겪는 소외감이나 트라우마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식으로 서서히 가족들에게 가지는 반감과 어긋난 감정도 바로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성장 소설이면서 동시에 비극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그런 기회가 뽀르뚜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박살'이 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이별은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사고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제제와 가족 사이의 간격, 특히 아버지와의 틈은 메꾸어지기 힘들 정도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소설의 말미는 결국 그 격차는 좁아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고 또 그런 점을 암시하면서 끝맺은 거 같습니다. 라임오렌지나무는 이미 잘려졌다는 제제의 마지막 대사가 그것을 증명하지요. 이미 어느 정도 자란 시점으로 봤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그것은 소설 속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순수함이 깨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슬프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속표지에 작가가 책을 내면서 기리는 이름들 중에 동생인 루이스, 누나인 글로리아 그리고 마누엘 발라다리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루이스는 스무 살에 삶을 포기하였고, 누나는 스물넷에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글프게도 이 집안의 비극은 당시 여섯 살이었던 제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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