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는 사정이 있어 본방을 보기는 어렵지만 재방송을 해준다면 오래전 회차라도 재미있게 보게 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오늘 혹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TV를 켰고 우연히 125화 재방송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125화는 2023년 11월 14일에 방영됐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어떤 주제가 나올지 감도 잡을 수 없었는데 MC와 게스트들이 할로윈처럼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 복장으로 등장하는 걸로 보아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더라고요. 이번에 보게 된 회차에서 다루는 주제가 다름 아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동화였는데, 어린 시절은 물론 동화를 베이스로 한 2차 창작물이나 새롭게 각색된 여러 창작물(이번 회차에 인용된 영상 중 일부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자료)을 보고 자란 입장에서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더라고요. 특히 전래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분석한 걸 좋아하는 데다 그림 동화와 관련해서 그림 형제와 관련된 책들을 몇 편 읽은 기억도 나서 특히 기대가 가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림 동화의 '그림'이 동화의 저자들인 그림 형제의 성씨 그림(Grimm)이 아니라 사람이 그린 그림(畵)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던데, MC들도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고 저도 그림 형제 관련 자료 서적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림 동화의 그림을 그런 뜻으로 착각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림이 동화를 수집하고 기록한 독일의 그림 형제를 지칭하는 것을 알고 좀 충격을 받은 기억도 있었달까. 좀 가물가물하긴 합니다만 그림 형제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아는 그림 동화가 실은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며, 현대 기준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도 잔인하거나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아 개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고 그림 형제가 동화를 찾아 수집한 데에도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었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 125화에서 더 상세하게 그 부분을 설명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번 125화 강연을 맡으신 교수님 정보. 참고로 관련 게스트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면 아실 수 있습니다.
https://sporki.com/general/news/943527
스포키 : 학대·살인? 동화라며…규현→은지원 경악 (벌거벗은 세계사)
스포키 일반 뉴스 : 14일 방송되는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5회에서는 반전으로 가득한 그림 형제의 동화를 낱낱이 파헤쳐본다.제작진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독어독
sporki.com
그림 동화가 어떤 것인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강연에서는 그림 형제가 어떤 시대에 어떤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들인지 설명합니다. 그림 동화는 흔히 독일의 대표적인 구전 동화들을 모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림 형제가 살았던 당시에는 독일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림 형제는 신성 로마 제국 휘하 헤센 제후국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언급돼요. 아버지가 법무관이라 지금으로 따지면 중산층에 가까우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생계 때문에 친척집에 맡겨지긴 했지만, 고등교육을 마치고 형제가 둘 다 우수한 성적으로 법대에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면 그래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스승의 도움으로 독일 문학계의 거물인 괴테와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는 걸 보면 말이죠. 또한 형인 야코프 그림과 동생인 빌헬름 그림의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는 사실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후 형제가 민담과 언어 연구를 위해 평생을 함께 한 뒷받침이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
흥미로운 사실은 독일이 탄생되기 전 신성로마제국 아래 분열된 공국과 다양한 왕국이 하나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게 된 배경과 법대에 진학했던 그림 형제가 전공을 틀어 평생을 독일의 언어와 민담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통일된 정체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 이유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그림 형제가 태어난 헤센 제후국이 프랑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자, 이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그림 형제는 독일인들이 가진 통일된 정체성을 확인하고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대중들을 통해 동화, 정확하게는 구전된 설화나 전설을 수집하여 하나의 책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이때 그림 형제가 동화를 수집할 수 있게 도와준 이들이 대부분의 여성들이었다는 점이 눈여겨볼만했는데요. 훗날 동생인 빌헬름 그림이 이때 이야기를 제공해 준 여성과 결혼했다는 후일담도 있었고요.
하지만 처음 출간된 그림형제의 동화책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책과는 달리 좀 더 날것에 가까운 이야기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책 자체가 삽화가 삽입된 이야기 책이라기보단 그 기원을 찾는 학술서적에 가까운 지라 그다지 인기는 없었으며 몇몇 이야기는 당시 기준으로도 잔인하다거나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살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후 개정판에서 내용을 수정하거나 순화하는 과정을 거쳤다고요. 여기서 날것에 가까운 내용으로 언급되는 구전동화들은 개구리 왕자, 백설공주, 신데렐라, 노간주나무인데 개구리 왕자는 성에 눈을 뜬 소녀의 성장기라는 해석이나, 백설공주의 계모가 실은 친모였다는 파격적인 설정,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자기가 구두 주인임을 증명하려고 발을 잘라내는 끔찍한 장면 등 어린이 대상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한 구석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계모가 전처의 아들을 살해하다 새로 환생한 아들에게 보복으로 살해당하는 노간주나무 동화는 충격 그 자체.
여기서 백설공주는 그림 형제가 특히 사랑하여 이후 개정판에서 빠지지 않고 들어갔던 동화라는 설명이 나오는데요. 백설공주가 살아나는 장면에선 백설공주의 관을 들고가던 왕자의 하인이 짜증이 나서 화풀이로 백설공주의 시신을 쳤다가 목에 걸린 사과가 튀어나왔다는 초판본의 설정은 검열과 수정을 거친 개정판보단 오히려 더 현실적이지 않냐는 MC들의 말에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백설공주의 계모가 불에 달군 쇠신발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결말은 중세의 마녀 사냥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해석이 뒤따랐는데 (후에 나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왕비를 아예 마녀로 묘사하기도 했고) 동화라고 하지만 은근히 현실적인 부분이 많고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덕에 훗날 나온 개정판이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개정판이 인기가 많아진 데는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설정을 수정하고 읽기 쉽게 만든 덕이 컸지만요. 또한 그림이 삽입된 영문 번역판의 인기에 힘을 입었다는 설명은 덤.
지금은 플랫폼이 사라졌지만, 그림동화를 블랙코미디에 가깝게 만든 작품 『이우일의 그림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요. 신데렐라가 원제인 '아셴푸텔(독일어 재투성이)'이라고 나오거나 요정 마녀가 아닌 묘지에서 자란 개암나무 설정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 웹툰은 그림 동화의 날것에 가까운 초판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앞서 말한 시대상을 반영한 동화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영아 살해를 은유한 헨젤과 그레텔, 착취당한 채 버려지는 독일 하층민들의 상황을 동물에 비유한 브레멘 음악대, 실제 기록을 모티브로 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있었는데요. 헨젤과 그레텔은 유럽의 대기근 사태는 물론, 과거 생계나 여러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번했다는 끔찍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브레멘 음악대는 당시 착취당하거나 갈데없는 하층민들이 독일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도시이자 상업도시인 '브레멘'에 몰린 시대적인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고요.
좀 더 충격적인 사실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단순 구전이나 동화가 아닌, 실제 있었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는 점이었는데요. 실제로 중세 기록을 찾아보며 도시에서 어린아이들 130여 명이 어떤 남자를 쫓아갔다가 갑자기 사라진 기이한 사건이 여러 번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선 더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선 설이 분분한데 강연에 따르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와 관련된 첫 번째 설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동부 유럽으로 사람들이 대거 이주를 시작했고 이에 시골에 살던 사람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여 이것을 피리 부는 사나이로 비유했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가설은 과거 십자군 전쟁 당시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어린이 십자군 부대가 모였으나 끝내 원정에 실패한 역사적인 사실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시대가 시대니만큼 저 어린이 십자군들의 행방은 매우 불운하게 끝났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요.
또 여러 이유로 개정판에는 싣지 못하게 된 초판본의 동화들이 언급되기도 하는데요. 그 이유에는 지나치게 잔인하여 수정과 검열을 하더라도 내용을 바꿀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례로 등장한 게 어린 형제가 푸줏간 놀이를 하다가 형이 동생을 찔러죽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엄마가 형을 찔러 죽인 뒤 자살하고 아버지도 충격으로 죽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교훈이나 재미가 있어서 만들어진 건지 보는 사람이 의아한 수준. 또는 프랑스의 동화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림 형제의 본래 목적 - 독일인들의 통일된 민족의식과 정체성 확립-과는 거리가 멀어 제외된 장화 신은 고양이나 푸른 수염과 같은 동화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신데렐라 이야기도 이미 각국에 유사한 구도를 가진 설화들이 천여 편이 넘게 존재한다고 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인접해 있는 국가다 보니 아무래도 영향이 없을 수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경우는 동화 자체가 재미있는 내용이다 보니 제외된 것이 좀 아쉽다고 할까...
강연에서 알려주는 흥미로운 점은 그림 형제의 업적이 단순 그림 동화를 수집하고 집필하는 데서 그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본래 그림형제는 언어학자에 독일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독일어사전을 편찬했다는 사실인데요. 사전 편찬 작업은 단순 단어의 뜻만 풀이하는 게 아닌 그 단어의 기원을 연구해야 하는 방대하고 복잡한 일이라는 설명은 덤. 그림 형제의 독일어 사전 편찬은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완성되었고, 최초로 등장한 독일어 사전은 과거 그림 형제 동화의 초판본이 나왔을 때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림 형제 사후에도 독일어 편찬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들이 편찬한 독일어 사전이 현재의 독일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그림 형제의 업적이 독일 입장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독일 지폐에 그림 형제의 초상화가 실려있는 이유를 이해하게 만드는 회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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