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예능 프로그램은 자주 보는 편이 아니지만, 가끔 가족들이 보는 걸 같이 보거나 TV를 켰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본방을 사수하거나 리뷰를 목적으로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은 예외적으로 『벌거벗은 세계사』 135화 본방을 사수하게 되었네요. 그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번 회차가 드라마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을 다루는 내용이기 때문인데, 솔직히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최근 전개에 학을 떼서 시청을 그만뒀지만 적어도 잘 몰랐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해 준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결론만 요약해서 말하자면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을 다루면서 적국인 거란을 밀도 있게 설명했고, 3차 전쟁까지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여 몰입을 유도하여 드라마의 노답 전개보다 훨씬 재미있게 봤다고 할 수 있네요. 프로그램은 중간중간 퀴즈를 내며 그걸 MC와 게스트들이 맞추는 것으로 분위기를 전환하기도 하는데 중간에 드라마에 쓰인 검차가 등장하는 건 예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랐네요. 갑옷 입고 검차를 끌고 온 병사도 재밌는 부분이었고요.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 황제 야율융서 역을 맡아 인상을 남긴 배우 김혁이 게스트로 초빙된 것도 본방 사수하는데 한몫했습니다. 옆의 게스트는 역사 크리에이터인 이영이란 분이며 강의를 담당하신 분은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신 권용철 교수입니다. 사진 자료 및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http://enter.etoday.co.kr/news/view/253705
135화에 인용된 영상은 다큐멘터리 『평화 전쟁 1019』와 더불어 『고려거란전쟁』 초반부 (명작 소리 들었을 때) 장면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강조의 정변부터 흥화진 전투, 그리고 1화 오프닝에 나온 귀주대첩 씬까지. 그리고 출처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 같은데 거란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른 영상물의 자료가 많이 삽입되었던 것 같네요. 또 거란의 풍습과 제국의 건국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선 침략국이고 약탈을 생업으로 삼다 보니 당시에는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테고, 심지어 고려 태조인 왕건 역시 형제의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킨 짐승 같은 나라라며 절대 교류해선 안된다는 강경책을 내세웠을 정도이긴 했지만 그저 야만인 오랑캐라고 치부하기엔 그 문화의 깊이나 그들이 역사 속에 끼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할 정도. 겸사겸사 중국 대륙의 다사다난한 역사 흐름은 덤으로 배울 수 있었다고 할까요.
특히 거란족 요나라의 시조인 야율아보기는 2미터 장신에 힘이 셌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정비하면서 유용한 거란 문자를 창제하는 등 소위 옛날 유행어인 '먼치킨'에 가까운 행적을 보인 인물이라 놀라웠습니다. 또한 그 후예인 야율융서의 어머니 승천황태후의 위엄도 언급되는데 어린 아들 대신 거란을 다스리면서 송나라와의 전쟁에 직접 갑옷을 입고 나서 지휘를 하고 '전연의 맹약'을 얻어낸 여걸이라는 사실이 설명됩니다. 이를 보면 거란족 사회는 고려 사회 못지않게 여성의 지위가 높지 않았을까 추측이 들더라고요. 또한 어머니의 그림자를 넘어서기 위해 야율융서가 고려와 전쟁을 벌였다는 동기도 설명되었고요.
하지만 발해가 약 한 달 만에 거란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좀 슬펐습니다. 고려는 버텼지만 발해는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는지... 하지만 이번 편은 '고려거란전쟁'이 중심이므로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넘어가더라고요.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략한 거란도 야율융서 사후 내부분열로 무너지다가 송과 여진의 협공으로 멸망했다고 나오긴 합니다만. 고려의 태조인 왕건이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내세우게 된 데 이 발해의 멸망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만부교 사건이 그 증거이긴 하지만 현대인 기준으로 낙타들은 죄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장본인들이고 고려를 침략한 나라라 당시 기록으로 좋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번에 알게 된 거란의 역사와 문화는 야만적이라고 넘어갈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약탈을 베이스로 삼는 유목 민족이면서도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우리나라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불상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거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는 장례 방식이 언급되며, 거란족 공주의 미라나 승려의 미라가 발굴된 사실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등장했고요.
거란족의 자비 없는 약탈 문화와 자비와 무소유가 근간인 불교문화가 어울렸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하게 언급한 MC들의 말은 간간히 등장한 유머라고 할까요? 그리고 마에서도 나오긴 했지만 정수리 부분을 깎는 변발 비슷한 스타일의 정확한 명칭 '곤발'의 이름과 그 필요성(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위생 문제를 해결하고 투구를 쓸 때 열을 방지하는 것)을 알려주거나, 거란족이 타고 다니는 말이 커다란 말이 아닌 가성비(?)가 좋은 작은 말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주는 등 드라마만으로 알기 힘들었던 상세한 부분을 알 수 있었어요.
거란의 요나라 건국과 거란과 송나라와의 지독한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1차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설명도 알기 쉽게 나온 편인데, 강동 6주를 얻어낼 수 있게 담판을 지은 서희의 활약이 특히 부각됩니다. 거란족의 총사령관인 소손녕(소배압의 동생)은 고려의 친조를 얻어내기 위해 약 15만 정도의 군사를 끌고 왔으면서 80만이라고 부풀리는 전술을 썼고, 서희는 강동 6주를 차지한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힌 것이니 자신들이 여진을 물리치겠다는 조건으로 화친을 약속하며 담판을 지었다고 나오더라고요.
방송에서 MC들이 감탄한 것처럼 1차 전쟁은 고려가 침략당하기는 했지만 영토는 더 넓힌 결과를 가지고 왔고, 당시 고려가 거란만이 아닌 여진을 상대해야 했던 상황을 적절하게 외교적으로 이용한 것이라 인상이 남았습니다. 외교 하면 서희고, 서희 하면 외교라고 할까 국립 외교원 앞에 서희 동상이 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납득. 그런데 이 1차 전쟁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하여 이것도 영상으로 보게 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차 전쟁에서 어떻게 거란이 패했는지, 그 전쟁 과정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고 나왔는데 당시 거란 입장에선 유목민족의 풍습 때문에 압록강의 물이 녹기 직전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보급이 부족했음에도 돌아갈 명분이 마땅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도 명분이 필요했지만, 회군할 때도 명분이 필요했다는 점에선 전쟁의 복잡함이 느껴졌다고 할까. 2차 전쟁에서 회군하던 거란군이 개경을 방화하여 많은 서적과 기록이 소실되었다는 안타까운 설명은 덤. 이때 가짜 친조 문서를 가지고 하공진이 사신으로 찾아오자 옳다구나 명분 삼아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의 친조 문서가 이후 있을 3차 전쟁의 계기를 제공하게 되더라고요.
2차 전쟁 설명에선 참고 영상으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양규 장군의 전투가 나와 반가웠습니다.
양규는 고려의 이순신이라는 묘사가 부족하지 않은 인물로, 중간에서 산을 타버린 드라마긴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이 그래도 훌륭한 점을 꼽는다고 한다면 이 양규라는 위인을 사람들에게 각인한 점이랄까요? 3천 명의 적은 숫자로 지켜낸 흥화진 전투와 1700명 군사로 성공한 곽주 탈환, 포로 3만 명 구출은 진짜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 근데 2차 전쟁이나 3차 전쟁에서 약간 기묘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는 신기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2차 전쟁 당시의 바람은 일종의 비유일 거라는 해석이 있지만, 3차 전쟁 때는 진짜 바람이 도움이 된 상황이었다는 게 특이했어요.
3차 전쟁의 메인 키워드는 현종이 직접 지시한 청야 전술과 강감찬이 이끈 귀주대첩입니다. 침략에 동원한 군사는 10만으로 2차 때보다 훨씬 줄어들긴 했지만 황제의 친위대인 피실군이라는 정예 기병만을 엄선한 거란도 거란이고 2차 전쟁을 겪었던 고려도 이후 3차 전쟁에서 이를 갈았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다큐멘터리 『평화 전쟁 1019』에서도 상세하게 나온 부분이긴 하지만, 소배압과 강감찬 두 명의 지장(智將)이 전술로 대립했으며, 그야말로 지리+기후+천운+의지+과거의 교훈 전부를 이용한 승전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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