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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비소설 기타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 리뷰

by 0I사금 2025.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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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는 찾아보면 굉장히 재미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총 열명으로 모두 권력지향적이었던 한 나라의 태후들인데 책에서 설명하는 인물들은 유명한 서한(전한)의 여태후에서부터 서한 말의 왕정군, 동한(후한)의 등수, 북위의 풍씨, 당대의 무측천, 요나라의 소작, 북송의 유아, 서하의 양씨, 청의 박이제길특씨, 청의 역협나랍씨(서태후)입니다. 이 중에는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여성도 있고, 낯선 여인도 존재하더라고요. 책을 읽다보면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 여성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나름 회한이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이들 중에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인물도 있는 반면 정말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인물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친족마저 내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여성들도 있는 반면, 오히려 업적을 쌓아 후대의 존경 속에서 천수를 누린 여인들도 있었다는 게 특이하더라고요. 

책의 첫장을 여는 여태후(여치)의 경우에는 다른 책들과 달리 그의 심리와 당시 정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흔히 인간돼지 척부인이 피해자라고 여겨진 것과는 달리 여후 역시 척부인 때문에 아들과 함께 쫓겨날 정도로 위태로움을 겪었고, 척부인이 여씨 일족에게 반역누명을 씌우면서 어그로를 끈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본처도 아니었던 척부인이 이렇게까지 방자할 수 있었던 전말에는 유방의 우유부단함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젊은 백수시절에서 급박했던 초한전쟁까지 자신을 보조하고 옆을 지키며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여태후보다 세상물정 모르던 척부인을 총애하여 그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도록 그냥 놔둔 셈인데, 만약 유방이 여태후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황후로써의 그의 지위를 존중하고 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확실하게 못 박았으면 유방 사후의 피바람은 불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일이죠. 한 문제의 어머니 박씨가 여태후 치하에서 살아남은 걸 보면 말이죠.

흔히 유방이 평민출신인 점이나 공신숙청을 했다는 점을 들어 명태조 주원장과 비슷하다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자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주원장이 더 확실했다고 봅니다. 주원장은 황위계승은 장자에게 준다고 강박적일 정도로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된 뒤에도 평생 함께 고생해 온 마황후를 아주 사랑하여 마황후가 먼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하면서 새 황후를 들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오히려 주원장 사후 피바람을 일으킨 것은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였습니다. 여태후 이야기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여태후의 정치 수완이 유방보다 한수 위였다는 사실인데,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황제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데에는 여태후의 힘이 컸다는 거죠. 유방은 황제이면서도 대세를 거스릴 힘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되더라고요.  또 권력을 거머쥔 태후들 중에는 남편-황제의 총애를 업고 그것을 디딤돌 삼아 높은 자리로 올라간 여인들이 있는 반면 남편의 총애가 없이 아들을 낳았다는 명분으로, 혹은 자신의 힘으로 높은 자리로 올라간 독한 여인들이 있는데요.

이에 해당되는 여인들이 전한 말의 왕정군, 북위의 풍씨, 서하의 양씨, 청의 박이제길특씨, 역협나랍씨가 있습니다. 오히려 남자의 사랑과 권력 거기에다 후손들의 존경까지 받으며 천수까지 누린 여인들인 동한의 등수, 요나라 소작 같은 경우는 내용이 심심하더라고요. 역시 내면의 폭력성 때문인지 불운한 인생에 더 눈이 간다고 해야 할까요.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여인들이 전한의 왕정군과 서하의 양씨, 그리고 청의 박이제길특씨입니다. 왕정군 같은 경우는 서한을 말아먹었다는 책의 타이틀과 성씨 때문에 혹시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과 관계있나 싶었는데 바로 고모와 조카 사이더라고요. 왕정군은 평범한 외모와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약혼자들이 결혼 직전 죽는 바람에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아이를 만들라는 높으신 분들의 강요에 못 이긴 황태자와 억지로 합궁한 뒤 왕자를 생산하여 황후와 태후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은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아들 역시 어머니에게 충성하는 타입은 아닌지라 그는 자신의 일족을 등에 업고 자리를 지켜야 했는데 하필이면 손을 잡은 상대가 왕망이었던 것. 

권력욕은 강했지만 정치적 수완은 없던 그는 왕망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였고 결국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자 큰 충격을 받고 무너집니다. 왕망이 친아들처럼 왕정군에게 효심을 다했으나 왕정군 한나라의 태후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고 남은 평생을 한나라의 여인으로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다가 쓸쓸하게 죽고 마는데요. 왕정군의 그런 인생은 평범한 인간이 권력의 나락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해 주는지라 다른 이야기보다 인상이 깊게 남았어요. 서하의 양씨 이야기에 나오는 서하라는 나라는 당시 송과 접전을 했던 나라 중 하나인데, 양씨는 한족이면서도 서하에 모든 것을 걸고 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여성입니다. 양씨는 황제의 형수이면서 황제와 눈이 맞아 자신의 시집을 멸문시키고 황후 자리에 오르는 등 거의 막장극을 방불케 하는 전적을 가지고 있는데, 한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도 대립하며 끝내는 그 아들 내외마저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자를 황제로 내세워 꼭두각시로 쓰면서 평생을 송과의 전쟁으로 보내게 되는데, 송과의 전쟁에서 대패하여 백성들의 원성도 커지고, 장성한 손자와도 대립하게 되지요. 특이하게도 서하의 양씨는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가장 전쟁에 심취한 여성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하의 혼란을 전쟁으로 돌려서 막으려는 속셈이었지만 한족이란 원죄를 벗어버리기 위한 그의 몸부림이 아니었는지... 그런 그도 결국 요나라와 손잡은 손자의 손에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던 것은 청의 박이제길특씨입니다. 이 여인은 청나라 초 권력을 거머쥔 여인으로 왕자(순치제)를 낳지만 남편 황태극의 총애를 받지 못했습니다. 황태극이 너무 사랑했던 여인 해란주가 일찍 죽자 황태극도 그를 따라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황실의 권력은 당시 황후였던 그의 고모와 황제를 낳은 박이제길특씨에게 건너갑니다. 황후마저 죽자 권력 대립은 섭정 다이곤과 박이제길특씨로 변모하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의 권력 대립 이전에 다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그 둘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 관해서 저자는 역사 기록들을 찾아보며 결코 이 둘이 권력을 두고 경쟁을 했을지 망정 결코 사랑의 증거는 존재할 수 없다며 그 증거로 다이곤이 급사한 뒤 순치제가 다이곤을 역모로 몰아 그 시체를 부관참시한 것을 드는데요. 순치제가 그렇게 한 뒤에는 어머니 박이제길특씨의 입김이 있었다는 것과 그만큼 그가 다이곤을 증오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요. 박이제길특씨의 특징은 굉장히 오래 살아 청나라가 전성기에 들어설 무렵 숨을 거두고 죽은 뒤에 추모되었다는 건데, 그의 손자가 바로 청의 강희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비록 남편에게 사랑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천수를 누린 그가 진정 승리자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하지만 이렇게 천수를 누리고 승리자가 된 여성은 드문 편으로 등수와 소작은 나름의 능력과 주위의 조력 덕에 훌륭한 삶을 살았고 박이제길특씨 역시 손자를 잘 둔 덕에 천수를 누렸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은 그 끝이 허망할 뿐만 아니라 여태후처럼 화살이 그 일가나 자식들에게 돌아갔다는 점이 눈에 띄더라고요. 왕정군이나 서하의 양씨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경우도 있고, 서태후는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두 눈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망쳤다는 오명까지 같이 뒤집어써야 했던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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