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에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번에 빌려온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바로 『모비딕』으로 유명한 작가 허먼 멜빌의 소설입니다. 처음 이 책을 발견하고 작가 이름이 낯익다 싶었는데 책을 좀 살펴보니 바로 소설 『모비딕』을 집필한 작가라는 게 나오더군요. '모비딕'은 유명한 소설이긴 하지만 아직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고, 다만 중학교 때였나 금성출판사의 청소년 문고로 나온, 아마도 많이 축약이 되지 않았나 싶은 버전의 책을 읽은 기억은 있습니다. 내용은 오래전에 읽은지라 전반적으로 잘 떠오르지 않지만 소설의 결말 부분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모비딕을 잡으려다가 결국 에이허브 선장의 배가 난파당하는 대참사를 당해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대다수 죽거나 행방불명되고 화자만이 홀로 살아남아 바다에 떠다니다 바다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던 - 에이허브 선장에게 아들을 같이 찾아달라고 도움을 청했으나 아마 거절당했던 - 다른 배의 선장이 탄 배가 그를 발견하여 구조되는 그런 결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청소년 문고판이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거친 모험과 비극적인 결말이 가미된 소설이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은 납니다. 그런데 그때 접했던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큰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인지 다시 제대로 된 번역본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게 신기.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본편에 들어가기 전 보르헤스의 시점으로 작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보면 이 허먼 멜빌의 생애도 상당히 소설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걸어왔다는 게 드러납니다. 이른 부친의 죽음, 가난으로 인한 학업 중단, 돈을 벌기 위해 선원생활에 뛰어들었으나 오히려 배에서 착취를 당하고 탈출하였으나 이번엔 식인종(!)들에게 붙잡혀서 두 달 만에 지나가는 배 덕에 탈출, 포경선에 여러 번 자원하다 탈출,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언급이 있으며 그가 가난을 벗어나게 된 것은 동료작가였던 호손 덕이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모비딕을 쓴 것도 호손에게 보여주기 위해 썼다는 글도 있고요. 그리고 이번에 실린 필경사 바틀비와 모비딕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공통점으로 이상한 고집스러움과 고독을 들고 있어요. 내용에 들어가시면 알겠지만 처음 소설 제목만 보고 받은 인상과 달리 이 소설 속 주인공 바틀비란 인물에게 뭔가 뒤틀린 구석이 있단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뒤틀림이 사악한 것이 아닌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하는 그런 묘한 것이라는 특징이 있지만요. 이것은 오히려 모비딕에서 광기의 끝을 보여주는 바람에 여러 심리학 서적에서 종종 인용되는 에이허브 선장과의 차이점이지요.
처음 책을 발견했을 때 실려있는 소설이 단 한편, 제목의 『필경사 바틀비』 뿐이라 좀 아쉬워서 미뤄둘까 했지만 다른 발견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아직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 이 책을 빌려온 셈입니다. 그런데 딱 한편 실려있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장편이라고 할 순 없는데, 일단 책 자체가 굉장히 얇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한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긴 합니다만 다른 소설책들의 분량과 비교하면 이번 『필경사 바틀비』는 단편 분량에 해당하는 소설입니다. 아마 허먼 멜빌의 단편집과 같은 부류의 책이 나온다면 무리 없이 들어갈 만한 분량인데 그 덕에 읽어가는 데도 큰 시간은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자신을 스스로 안전제일주의자라고 칭하는 변호사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고용한 필경사인 바틀비라는 인물의 기이한 행적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선 이 바틀비 말고도 다른 고용한 필경사들이 나오는데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별칭으로 나오며 이 둘도 보면 성격이 특이하긴 마찬가지였죠. 필경사인 터키(칠면조)는 일은 잘하지만 어딘가 칠칠맞은 구석이 있는 노인이며, 다른 필경사인 니퍼(집게) 역시 성실하지만 신경질적이고 소화불량을 앓는 인물로 둘 다 발작적인-정신질환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격이 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걸 말하는 듯- 구석이 있어 한 사람이 발작하면 한 사람은 얌전해진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의 두 사람을 잘 데리고 있는 걸 보면 이 변호사 양반도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다고 느껴져요.
그리고 나중에 바틀비를 고용하는데 바틀비는 인상이 창백한 남자로 처음엔 굉장히 일을 잘해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바틀비가 중요한 서류를 검토하는 것을 거부하여 변호사와 주위 사람들을 당혹게 하고 자신의 서무를 보는 책상에서 움직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변호사는 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묻지만 바틀비는 대답도 거부하고 움직이는 것도 거부하지요. 그런 일이 지속되자 변호사 사무실의 바틀비에 대한 소문이 나게 되고 결국 견디다 못한 변호사는 사무실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립니다. 하지만 그가 사무실을 옮긴 뒤에도 바틀비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결국 사무실에서 쫓겨나지만 그는 건물밖으로 나가긴커녕 건물 안과 계단을 배회하며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고 건물주는 그를 부랑아로 경찰에 신고해 버립니다.
바틀비는 교도소에 수감되는데 거기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지도 않고 버티다가 죽음을 맞게 되고 화자인 변호사가 가끔 그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가 그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이길 그가 원래는 워싱턴에서 배달이 불능된 우편물을 소각하는 말단 직원이나 행정부가 바뀌면서 해고되고 자신의 사무실에 취직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좀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누군가를 구원했을지 모를 우편물들이 결국 원하는 사람에게 닿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 바틀비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아무래도 바틀비가 느꼈던 것은 절망에 가까운 그런 것이었을까요? 물론 소설은 확실하게 답은 내지 않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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