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은 제목 그대로의 소재를 썼다는 거랑 수양대군-세조랑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정보만 알고 극장에 보러 가게 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한 인물이 밤에 일어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호위대를 지나 방에서 빠져나오면서 두려움에 질리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예상밖의 전개에 놀라게 되었는데 이 인물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중요하게 나오더군요. 그 인물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로 영화의 초반부는 한양에서 기생이자 관상을 보는 일도 하던 연홍(배우 김혜수 분)이 관상을 보는데 도가 튼 김내경(배우 송강호 분)을 동업자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몰락한 양반가의 김내경은 처남(배우 조정석 분)과 아들 진형(배우 이종석 분)과 함께 살고 있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편지를 남긴 채 집을 떠나고, 내경과 처남은 연홍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녀의 기생집에서 거하게 놀다가 그때 발목이 잡혀 내내 관상을 보는 일을 합니다. 그 와중 내경은 한 살인사건의 진범을 관상으로 파악하여 잡는데 도움을 주고 그 사건의 범인이 수양대군 측 사람이라 그를 견제한 수양대군 측에 의해 처남과 함께 죽을 고비에 놓였다가 김종서(배우 백윤식 분) 측의 사람들에 의해 겨우 살아난 뒤 그쪽에 협력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목적이 자신들의 출세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왠지 우리나라 사극 영화중에는 초반엔 작정하고 관객들을 웃기다가 점점 비극으로 치닫는 경우들이 있는 거 같았습니다. 예전에 본 『왕의 남자』나 『황산벌』, 『최종병기 활 』같은 영화들도 그랬는데 이 『관상』도 처음엔 두 주인공 내경과 처남의 추태 때문에 보는 관객들이 계속 폭소를 터뜨리더군요. 하지만 극의 흐름이 진지하게 바뀌는 것은 바로 김종서와 대립하는 수양대군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면서부터고요. 그런데 여기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수양대군(배우 이정재 분)은 왠지 『최종병기 활』의 쥬신타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극 영화의 인상적인 악역 캐릭터로 기억될 거 같습니다. 문종(배우 김태우 분)의 장례식 중 검은 복장으로 첫 등장하는 것부터나 왕위를 노리기 위해 극 중 벌이는 책략과 대담함,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등등...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호랑이상으로 알려진 김종서의 기를 꺽고 경고의 의미로 자신과 자신의 사병들이 사냥한 호랑이를 죽여 가죽을 벗긴 채 거기에 수십 개의 화살을 꽂은 뒤 매달아 보낸 장면이었어요. 영화의 악역으로 활약하는 표면적인 인물은 수양대군이지만 실질적인 흑막은 바로 한명회(배우 김의성 분)로 실제 역사에서도 수양대군의 오른팔로써 활약했지만 영화에선 젊은 시절의 한명회는 그림자에 그려지거나 가면을 쓰며 내경을 협박하는 등의 모습으로 나와 궁금증을 증폭시키는데요. 거기다 모든 파국의 씨앗이 이 자의 손에 뿌려지면서 수양대군보다 악랄한 인상을 심어주는데요. 영화의 주된 소재는 관상이며 관상은 그동안 그 사람이 살아온 자취를 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 중 몇몇은 내경이 지적했던 대로 파멸로 다가가는데요.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서 측에서 자신들과 가까운 인물을 관리로 뽑는데(영화에서 황색 종이를 합격자 이름 위에 미리 붙이는 것으로 나옴) 김내경의 아들 진형은 고향에 있을 무렵 시전상인의 처를 겁탈하던 인물이 그 덕에 뽑히게 되자 그 방식의 불리함을 단종에게 고한 뒤 김종서 측이라고 일컫는 인물들로부터 린치를 당해 양눈을 잃고 맙니다. 진형은 역적 집안이라 과거를 볼 수 없어 그의 삼촌이 친구 보부상의 이름을 빌려주도록 손을 써주고 과거를 보러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준 거였는데 오히려 이런 일이 생겨버리자 삼촌-내경의 처남은 수양대군에게 김종서측의 수양대군을 저지하기 위해 세운 계획을 모두 불어버리고 내경의 안위와 진형의 벼슬자리를 부탁하며 통곡하게 돼요.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한명회의 계략으로 처남의 성급함으로 인해 결국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발빠른 행동으로 역으로 습격당해 죽임 당하는데 단 김종서의 죽음 부분은 실제 역사와는 약간 다르게 각색된 거 같아요. 그리고 단종의 편에 섰던 아들 진형도 내경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하게 되는데요. 초반 내경이 아들에게 벼슬자리에 오르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말, 이는 아들을 지키려던 김내경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의도로 말을 한 바 있고, 처남에겐 목젖의 모양이 성격이 성급한 것을 보여준다고 이른 적이 있는데 이 둘은 내경의 말대로 파국을 맞은 셈입니다. 모든 것을 목격한 처남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마지막에 목젖을 잘라내려다 목소리를 잃고 말지요.
이 장면에서 좀 생각한 것이 한명회의 계략이 아니라 진짜 김종서 측의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그런 것이라면 더 비극적인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한명회의 악랄함과 교활함 그리고 그와 얽힌 주인공들의 악연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 한 듯 싶더라고요. 영화의 소재도 소재지만 그 내용은 운명이란 것은 바꾸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가는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종은 수양대군이 혈연이란 이유로 김종서의 충고를 무시하는데, 그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 단종이 보는 관상책에 나온 역모상을 상징하는 점을 주인공인 내경일행이 몰래 의원으로 분장하여 수양대군의 이마에 심는데, 오히려 이것은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켜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기정사실화시켜 버렸다는 느낌.
반면 보복이라고 할지 마지막에 내경은 자신을 찾아온 한명회에게 목이 잘릴 것이라는 말을 건내여 그 이후 평생 그를 공포 속에 살게 하는데요. 역사 속에서도 보이듯 한명회는 천수를 누렸고, 영화상에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들어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죽어라 처신한 덕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명회의 죽음 장면은 묘하게도 벽에 장식되어 있는 칼이 그의 목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구도가 잡힘으로써 내경의 말대로 그의 정신은 목이 잘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자막으로 한명회는 연산군 때 부관참시당했음을 알려주며 결국 죽어서 내경의 예언이 맞아떨어짐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불어 약속과 다르게 내경의 아들을 죽이는 수양대군의 비정한 모습은 후에 그의 자식들도 요절했음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어 운명이란 것은 결국 자신이 쌓은 업의 영향도 없지 않음이 떠올랐습니다.
또 영화를 보면서 약간 오류를 지적하자면 조선시대에는 화폐가 숙종대에야 등장했기 때문에 문종-단종 시기인 당시 엽전이 쓰인 것은 고증에서 어긋날텐데 원래 그 시대에는 쌀이나 면같은 것으로 화폐를 대신했겠지만 영상에서 그런 것으로 보여주기엔 좀 폼이 나지 않아서 그러려나요? 하지만 당시 사극에서 생략되던 여성의 가체머리가 등장한 것은 반갑더군요. 근데 생각보단 연홍의 비중이 적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평가가 여러모로 갈릴 조선시대의 왕이겠지만 세조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영화로 여러번 각색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창작물로 만들기에 그 시절의 비극도, 인물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역사적인 평가와 별개로 이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양대군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