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혹시 읽을만한 제 취향의 소설 같은 게 없나 살펴보다가 일본 소설 코너에서 하나 골라 대출했던 책입니다. 실은 작가 정보도 모르고 다만 미스터리 계열 소설이 나란히 놓여있는 가운데 단편소설집이라고 여겨진 책을 고른 것인데 자세히 살펴봤더니 작가에 대해 아예 모른다고는 할 수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좀 오래전에 '십각관의 살인'이라는 일본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이 단편소설집의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가 같은 작가였기 때문에요. 그런데 일본 추리 소설 하면 '십각관의 살인'이 자주 언급되거나 심지어 이 단편집 속표지에서도 홍포 문구로 일본 추리 소설계의 판도를 바꾼 관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상당히 인상 깊게 홍보가 되던데 당시 읽었을 때에는 기대가 커서 그런 건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동기가 그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와닿지 않는 느낌이었던 게 있었어요. 여자 친구의 죽음이 사고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친구들을 살해한다는 게 좀 맘에 안 들었던 것일지도요?
어쩌면 제가 범행의 트릭보다는 범인의 심리와 동기를 낱낱이 파헤쳐 주는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쪽이 좀 더 취향에 맞기 때문에 소설 자체가 그저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여간 이 소설을 빌려왔을 때는 작가 소개를 보기 전에 같은 작가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추리소설이라고 하니까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의 특징도 알 것 같다는 느낌인데요. 실제로 실려있는 소설들의 대다수는 정체성이 또렷하지 못한 인간들의 수기를 통해 조금씩 단서가 뿌려지다가 막판에 반전이 드러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실은 처음엔 정신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의 이야기라기에 아무래도 도시괴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게 정신병원이란 점도 있고 으스스 함을 기대하면서 소설을 읽어갔는데 오히려 소설은 그런 공포보다는 인간들의 아픈 기억이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서 그 느낌만으로 본다면 추리소설가는 아니요 환상이나 기담 소재를 차용했던 소설가들의 느낌을 받기도 했고요. 누군가가 남긴 기록물을 통해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면서 실체를 밝힌다는 점은 왠지 미쓰다 신조의 소설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했습니다.
책에 실려있는 소설은 세 편인데 일단 같은 병동에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일종의 연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들 자체는 따로따로 읽어도 이해에 무리가 가진 않습니다. 일본 소설들 중에는 이런 형태로 배경이 통일된 상태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만 다른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들이 많아 딱히 낯설지는 않았어요. 다만 외국 소설에선 많이 보던 형식인데 반해 한국 소설에선 많이 접한 기억은 없네요. 첫 번째 소설 '몽마의 손'은 정신착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살해한 뒤 병동에 수감된 어머니를 '문병'가는 청년 다다시의 이야기인데, 다다시가 우연히 발견한 어린 시절의 일기와 그 일기에 기록된 이상한 악몽의 기억 등을 통해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서서히 밝혀집니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처음엔 샴쌍둥이의 비극인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는 쌍둥이 형제의 비극으로 전개되는데 오히려 후반의 진실을 본다면 이 쌍둥이의 이야기 자체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감당하기 힘든 다다시가 만들어낸 허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두 번째 소설 '409호실 환자'는 교통사고를 당한 세리자와 부부 중 기억을 잃은 생존자의 이야기입니다. 생존자였던 주인공은 자신이 남편 세리자와 슌의 부인인 소노코인지 아니면 슌의 내연녀인 사나카인지 확신하지 못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자신이 남편의 내연녀인 마야란 여자를 살해했고 소노코와 또 다른 내연녀인 사나카는 실은 같은 사람이었단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을 통해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내연녀의 시체는 사고 당시가 아닌 이미 2년 전에 죽어 백골이 된 상태였고 그의 고백을 듣는 주변인들의 반응 역시 미묘하다는 게 드러나는데요. 결말에서는 살아남은 생존자가 실은 부인인 소노코가 아니라 남편이 세리자와 슌이었으며 사고 당시의 화상과 부인의 죽음, 그리고 사고로 인해 생식 기능까지 잃은 상황에서 정신이 붕괴한 나머지 자신을 슌이 아닌 부인 소노코라고 믿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결말을 보고 소설을 다시 읽으면 곳곳에 단서가 약간씩 뿌려진 게 보인다고 할까요.
마지막 소설 '프릭스 : 564호실 환자'는 단편들 중 제일 분량도 많고 내용도 특이한 편입니다. 작중에서는 내용의 소재가 아예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 섬 악마』라는 소설에서 따온 것이라는 언급되어 있고 후반 작가 후기에서는 그 외에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영화 『프릭스』도 오마주한 것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마지막 소설은 자신을 추악하다고 여긴 거부가 자신의 분풀이를 하기 위해 고아들 다섯 명을 입양, 다른 인간들과 접촉을 못하게 자택 내에 감금하고 그들의 신체를 훼손하여 기형으로 만든 뒤 학대를 가하다 살해당하고 나중에 경찰에 알려진 뒤에서 파장이 심할까 봐 사건을 은폐했다는 줄거리인데 세상에 별 기괴한 이야기들이 다 있기 마련이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앞의 것들과 달리 좀 현실성이 부족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실린 기록물을 가지고 미스터리 소설가라는 인물과 그 친구가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토론하는 내용으로 줄거리 자체가 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은 데다 소설 자체가 교묘하게 반전이 걸쳐져 있고 그 구성 자체가 앞의 두 소설과는 많이 달라 상당히 독특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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