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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과 만화

『우주전쟁』 리뷰

by 0I사금 2025.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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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이나 『타임머신』 등 웰스의 유명한 소설들을 어떤 기회로 말미암아 몇 번 접하고 이 작가의 작품 세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작가에 대한 정보나 작가가 쓴 소설들의 정보를 찾아보면 거의 SF 소설의 효시 격이나 다를 바 없는 작품들을 썼다고도 나오는데, 실제로 그의 소설들에 나온 소재들을 보면 현재의 많은 매체에서도 여러 번 써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작 중에서 『투명인간』과 『타임머신』은 이미 읽었으니 다른 대표작인 『우주전쟁』을 읽어볼까 했는데 웬걸 아쉽게도 도서관에 맘에 드는 책 종류가 없었어요. 어떤 도서관은 아예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고, 다른 도서관에는 책이 두 종류 있긴 하지만 하나는 책이 좀 낡은 편이라 선뜻 손이 안 갔습니다. 하나는 아쉽게도 청소년 문고본이라 축약된 것으로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 읽을 엄두를 못 내다가 그냥 낡은 책이라도 아쉬운 대로 읽자면서 빌려왔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집사재에서 나온 『우주전쟁』이었습니다. 집사재의 번역본은 책 디자인이나 구성은 불만 없는데 책이 나온 시기가 2005년이라 좀 오래 전이고 현재는 책이 절판된 상황인데다, 도서관에서 책 관리가 부실했던 탓인지 마치 책의 일부가 물에 젖었다가 그것을 말린 것처럼 종이가 울퉁불퉁한 느낌이 들어서 좀 손대기가 그랬습니다.


책의 상태가 그럼에도 한번 읽기 시작하자 꽤 흥미롭게 책 속의 세상에 빨려 들어갔는데 일단 『우주전쟁』의 간략한 내용은 예전에 학습용으로 번역되어 나온 미국의 그래픽 노블로 대강의 내용은 파악한 바 있습니다. 다만 그 책 역시 만화화하면서 내용의 상당수를 축약한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즐기려면 역시 소설판을 읽어야 했는데, 이렇게 다 읽고 나니 만화가 얼마나 많은 내용을 생략했는지 알겠더군요. 이 집사재에서 번역된 『우주전쟁』은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개를 늘어놓는데 웰스가 소설을 발표하기 전 이미 소설가 쥘 베른에 의해서 최초 SF 소설의 형태는 나와 있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다만 웰스 생전에는 장르에 대한 호칭이 없었고 사람들이 단순히 '과학 이야기' 정도로 불렀다가 1929년이 되어서야 SF 소설이라는 호칭이 생겼다고요. 우리가 매체를 통해 많이 접한 소재들 같은 경우가 이 웰스의 작품에서 나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한데 일단 외계의 괴물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설정 또한 1898년에 출판된 『우주 전쟁』이 시초라는 것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소설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소설의 배경이 19세기 말의 영국이라는 점이 있을 뿐 소설에서 묘사되는 외계인의 침공이라든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인간들, 습격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들의 여러 군상은 꽤 리얼해서 이것이 한 세기 전에 나온 소설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요. 보면 시대만 약간 바꾸고 여기 나오는 인간들 모습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여 다른 매체로 원본 내용에 충실하게 리메이크 한데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톰 크루즈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우주전쟁』이 아무래도 이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평은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굉장히 흥미가 생기더군요. 소설의 중심 내용은 화성에서 어떤 조짐이 발견된 뒤 지구에 화성인들이 도착해서 대학살을 벌이는 것이지만 실상 묘사가 많이 되는 부분은 외계인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는 인간들의 반응과 모습입니다. 인간들은 초반엔 외계인의 로켓이 떨어진 것을 신기한 구경거리로 여기며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외계인들이 본색을 드러내자 공포에 질리며 달아나는데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기사로 외계인들이 인간을 습격하고 도시를 파괴한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것을 대단찮게 여기며 아직 자기 앞에 닥친 일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거나, 상황을 미처 파악 못한 곳에는 외계인 침공보다는 열차가 사고의 여파로 끊긴 것에 더 열을 내는 모습들은 참으로 우습기까지 하더라고요. 거기다 소위 당시의  ‘기레기’라고 불릴 만한 기자들이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일단 주워들은 것으로 기사를 써 대서 발행부수를 높이려는 수작을 부린다거나 하는 모습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여러몰 와 닿는 게 있었습니다. 외계인의 습격이 본격화되어 영국이 초토화되기 시작하자 아비규환에 시달리는 피난민들의 모습이나 공포 속에서 미쳐버리는 인간 등 어떤 의미에선 공포소설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요. 소설을 읽다 보니 예전에 읽은 만화판이 어떤 내용을 축약시켰는지 알 수 있었는데 내용 중반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동생 파트는 거의 생략되었고, 바로 군함 ‘선더 차일드’호가 외계인과의 싸움 끝에 장렬히 최후를 맞는 장면만이 묘사된 셈이었어요.

 

책에서 자세히 묘사되는 외계인의 모습은 갈색 피부에 머리라고 할 만한 몸통, 커다란 눈과 촉수를 지녔고 사람을 습격하고 납치하는 이유도 소화기관이 따로 없어 인간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서라고 나옵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자신들이 피난할 때 쓴 마차를 돌려 주러 가다가 외계인의 습격에 고립되는 와중에 외계인들이 인간들을 잡아 산 채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목격하여 공포에 질리기도 하며,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들의 로켓이 어떤 형태로 생기고 어떻게 인간을 습격하는 기계를 만들어 가는지도 목격하여 자세하게 묘사하는 편입니다. 소설의 서장에는 화성인들이 지구에 도착하자 그들이 지성이 있는 존재니 호의를 가지고 학자들이 접근하다가 공격에 순살 당하기도 하는데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본다면 외계 존재에 이렇게 호의적인 점도 참 신기합니다. 같은 인간끼리는 잘도 싸워대면서 외계 존재는 좋은 존재일 거라 지레짐작하다니? 그런데 소설 상에서 묘사되는 외계인의 모습을 본다면 마치 예전에 본 영화 『더 씽(2011)』의 괴물과 유사하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말은 이미 만화판으로 접해서 아는 바이긴 했지만 이런 파괴와 혼돈 속에서 조금은 황당하다 싶은, 그러면서도 굉장히 참신하게 끝납니다. 인간들의 군대도 외계인을 상대로 제대로 이기긴 어려웠고, 영국은 끝이라고 생각해서 프랑스로 도망가는 사람들도 속출하는 마당에 외계인들이 지구의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자멸하는 것으로 끝나거든요. 즉, 인간들의 승리는 스스로 성취했기 보단 정말 행운으로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던 셈. 겨우 살아남은 주인공은 고향 집으로 돌아와 피신했다가 돌아온 아내와 재회하고요. 소설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그 고난을 겪고 살아남은 주인공이 자신이 겪은 일과 동생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읽다 보면 이 정도로 초토화된 영국이 과연 회생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영국 정부 측에서 외계인들이 남긴 부산물과 시체를 통해 나름 정보를 얻는 등의 모습이 약간이나 묘사됩니다만. 내용 초반에 이미 멸종한 ‘도도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도도새들이 인간의 위험성을 모르고 소설 속에서 ‘우리 부리로 그놈들을 쪼아 죽이자’라고 떠드는 모습은 위기를 코앞에 두고도 별생각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더 큰 존재 앞에서 인간의 자신만만함은 별것 아니란 것을 그대로 드러내서 묘하게 서늘함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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