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처음에 이 책을 빌려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잔혹한 남성들의 이야기를 쓴 『세계 악남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도서관엔 구비되어 있지 않더군요. 그럼 꿩대신 닭이라도 빌려보잔 생각으로 빌려보게 된 책인데 실은 악녀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많이 읽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 읽는 것은 그림과 사진을 같이 감상하는 복습이 되었다고 해야겠네요.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그리고 인간의 어둡고 추한 단면을 알게 해주는 책이고 또 어떤 의미에선 성별 편견으로 치우치지 않았냐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법한 책이지만 인간의 기이한 행적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고 특히 여성들 역시 남성들 못지않은 권력욕과 잔인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요물이나 마녀라는 구시대적인 사고관이 남아있어서 이런 '악녀'에 관한 책이 나온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많으며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악녀가 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책에서 소개되는 악녀들 중엔 좀 억울한 평가가 따라오지 않았나 싶은 여성들도 있긴 있었어요. 그저 미인계를 과도하게 남발하여 정치에 썼던 클레오파트라나 지나친 수동성 때문에 막장 일족에게 이용만 당한 루크레치아, 정치적으로 백치에 가깝고 시대의 흐름을 잘 읽지 못한 마리 앙투와네트는 당대의 루머 때문에 망가지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메리 스튜어트 역시 여왕으로서의 신중함을 잃고 열정에 몸을 맡긴 게 잘못이면 잘못이지 악녀라고 하기엔 부족해 보이고요. 마그다 괴벨스는 특별히 눈에 띄는 행적은 없으나 악명 높은 나치의 선전당원 요제프 괴벨스 때문에 오명이 더 커지지 않았나 싶어요.
읽으면서 가장 엽기적이라고 느낀 것은 역시 루마니아 희대의 살인마 '에르체베트 바토리'였는데 회춘을 위해 수백 명의 처녀를 죽여 그 피로 목욕을 일삼은 여인입니다. 현대에는 그 사건이 일종의 마녀사냥으로 상당히 왜곡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당대 귀족들이 행하는 짓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닌가 싶어요. 이와 비슷한 살인마가 질드레가 있는데 질드레의 이야기는 책 『세계사 속 범죄의 재구성』에 자세히 나오는 편. 바토리와 비슷한 사디스트 살인마로는 독살마 브랑빌리에 후작부인이나 소설 봉신연의에서 구미호로까지 변한 은나라의 악녀 달기 같았는데 달기는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기보단 주왕을 유혹해서 저지른 것이며 특이하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잔혹한 짓을 벌였다기 보단 색욕과 살인에 심취하기 위해 권력에 다가선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머지 열거되는 여인들은 네로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프랑크왕국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가지고 온 프레데군트와 브룬힐트, 영국의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인데 읽을 때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의외의 사례이긴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여성인 듯해요. 책에 기록된 것도 죽음의 기록보다는 그가 총애한 남성들 위주로 나오더군요. 프랑스의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치,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후, 중국사에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청나라에 망조를 가지고 온 서태후도 있는데 이 여인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 방해물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여성으로서의 질투심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 여후는 남편의 총애를 받아 자기 자리를 넘본 척부인을 아주 잔인하게 죽였고 자기에게 걸림돌이 되는 개국공신들인 한신과 팽월 등을 가차 없이 숙청합니다. 측천무후는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아들들까지 죽였고 전왕비와 남편의 총애를 받은 후궁 그리고 자기 언니도 죽게 만들지요.
서태후는 권력을 위해 정적이라고 하지만 유순했던 동태후를 살해하고 황태자 부부들을 핍박하여 죽게 하고 프레데군트와 브룬힐트는 여성들의 대립이 국가적으로 확대되다고 봐도 무방할 듯해요.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보다 숙모 레피다를 더 사랑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고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자기 남편도 독살합니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연적인 디아느를 궁에서 쫓아낸 거 외에는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성바르톨레메 대학살을 일으킵니다. 근데 여기서 여후의 행동은 그 잔인함을 빼면 이해가 가는 것이, 남편인 유방이 가난한 백수시절부터 초한전쟁이 일어났을 동안 내조하면서 살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외면받고 자기 아들마저 위태로워지니 그 분노가 폭발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잔인한 연적 제거와 공포정치가 항상 문제가 되지만 실제로는 민생안정을 위해 여러 제도도 만들어놓고 반란의 요소를 말끔히 제거한 탓에 후에 유방도 외면한 후궁 박희의 아들 문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 한나라 최고의 태평성대로 가는 밑거름이 된 게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이와 비슷하게 서태후가 당시 해군의 지원금을 빼돌려 지은 이화원이 당대는 나라를 망조로 이끈 사치의 장소였지만 현재는 관광지로 그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떠올랐어요. 그리고 책에서 보면 서태후에 대한 전설 같은 일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태후는 어린 시절 예허나라라는 일족의 시녀로 들어가게 되는데 예허나라는 청에게 멸망당한 원한으로 청을 멸망시키라고 유언을 남긴 예허나라왕의 후손들의 일가로, 예허나라라는 성을 갖게 된 서태후가 청나라 왕실의 궁녀로 들어가 태후 자리까지 오르고 결국 청의 멸망을 이끌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일화는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어딘가 운명론적 성향을 띠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읽다 보면 특이한 것이 평생 처녀로 산 엘리자베스 여왕을 제외하면 다른 권력가들은 다 자식들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 중에 하나도 어머니를 닮은 똑똑한 아들이 없다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아들들이 어머니 기세에 눌려 유약해졌는지 모르지만 아그리피나나 카트린, 여후나 측천무후, 서태후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인물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어머니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가능하지만 엄연히 나라의 주인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의 전횡을 막지 못한 데에 비난은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권력가 엄마의 아들들 중 똑똑한 애는 반항의 기질이 보여서 제거당했을 수도 있겠지만요. 이 책에 나온 여성들 중엔 역시 권력을 위해 권모술수와 악행을 일삼았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데, 이는 권력지향적이라는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은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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