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서문에는 "성서는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바벨이라 명명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혼돈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또한 보르헤스에게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석인' 단 한 권의 '총체적인 책'에 다가가고자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런 책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그런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다. 장님 호메로스가 기억 dp만 의지해 『일리아드』를 후세에 남겼듯이 인생의 말년에 암흑의 미궁 속에 팽개쳐진 보르헤스 또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의 환상의 도서관을 만들고 거기에 서문을 덧붙였다. 여기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은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통 여러 번 읽은 작가의 소설집인 경우 재탕할 생각으로 찾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작가라도 나오는 출판사가 다 달라버리면 그 중에 읽은 적 없는 작품들이 종종 들어있긴 합니다. 게다가 이번 책 『바벨의 도서관 : 도둑맞은 편지』는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은 데다가 디자인도 좀 이뻐서 빌려온 셈인데 이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바로 보르헤스가 편찬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제1권에 해당하는 작품집입니다. 전 순전히 에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빌려온 거지만요. 책에 실려있는 단편은 명탐정 뒤팽이 활약하는 제목의 그것을 포함하여 총 다섯 편으로 나머지 단편들의 제목은 「병 속에서 나온 수기」, 「밸더머 사례의 진상」, 「군중 속의 사람」, 「함정과 진자」입니다.
근데 이 중에서 이미 읽은 단편이 총 세가지더라구요. 죽어가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죽음의 진상과 소생술에 대한 실험을 하는 내용이 담긴 음울한 분위기의 소설인 「밸더머 사례의 진상」은 예전에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 공포 문학 걸작선』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데 당시 실려있던 제목은 「발드마르씨 사례」라고 나와있었어요. 「밸더머 사례의 진상」은 굉장히 특이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다른 단편들보다 내용을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도둑맞은 편지」는 흔히 접하게 되는 단편이라 두 번 언급할 필요성은 없어 보이고, 마지막 단편인 「함정과 진자」는 생각의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단편집인 『붉은 죽음의 가면』에 「구덩이와 시계추」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던 소설인데 이것 역시 그 발상이나 분위기가 독특하여 기억하던 소설이었습니다.
근데 제목의 번역은 좀 더 직설적으로 번역한 「구덩이와 시계추」 쪽이 더 맘에 들더라구요. 내용은 이단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남자의 생존분투기인데 여기 나온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나 처형 방식이 끔찍한 구석이 있지요. 결국 이 중에서 제가 읽지 않은 단편은 「병 속에서 나온 수기」와 「군중 속의 사람」 이 두 가지입니다. 「병 속에서 나온 수기」는 난파당한 배의 생존자가 우연히 수상쩍은 배에 올라타게 되는데 그 배가 어떤 조류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던 일종의 수중지옥과 같은 상황이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 생존자가 배에서 얻은 종이와 펜으로 써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끔 병에다 넣어 바다에 버리지요. 아무래도 읽다 보면 음모론 중 하나인 '지구공동설'이 떠오르게 되는 결말로 끝맺더라고요. 결국 그 배는 조류를 타다가 어떤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꽤 절망적인데 어딘가 열린 결말 같은 구조로 끝납니다.
반면 「군중 속의 사람」은 처음 읽고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 들어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시 읽어서야 감이 잡히던 소설인데, 내용은 딱히 특별한 줄거리 없이 카페에서 길가를 구경하던 화자가 어떤 특이한 노인을 발견하고 그를 미행하다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노인은 사람이 있는 곳을 돌아다니기만 할 뿐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데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 의하면 아무래도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을 형상화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 노인이 혼자 있기를 거부한다는 데선 결국 악이란 인간들이 서로 어울려야 생겨나는 결론인가 하는 미묘한 생각도 드는 소설이었어요.
이미 읽은 적 있던 소설이던, 처음 접하던 소설이든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어떤 소설은 서사 자체에 초점을 두어 포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반해 어떤 소설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샅샅이 파헤치는 것에 초점을 두기도 하고, 또 어떤 소설들은 포의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뭔가 굉장히 복잡한 말이 많다는 느낌도 종종 받곤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랄지 포의 소설 세계에서 일종의 희망이나 구원 같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포의 소설은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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