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좀 예전에 영화화된 작품이 있어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영화의 흥행이나 평은 모르겠지만, 제목이 특이한지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는데 정작 원작 소설을 읽을 생각은 못했던 사실.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조금 웃긴데, 근방 셀프세탁소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비치된 책들이 몇 권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책을 발견한 덕이었습니다.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일단 책 자체가 두껍지 않고 문체가 어렵지 않은 데다 소설 자체의 몰입도가 있어 짧은 시간에서 후루룩 읽어간 느낌이었어요.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일흔이 된 알츠하이머 노인 김병수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살해한 걸 시작으로 줄곧 살인을 저지른 인물인데 그에겐 입양한 딸 은희가 있고, 은희가 자신에게 남자친구인 박주태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파란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김병수는 은희가 데리고 온 남자 박주태가 은희의 목숨을 노리는 살인범이라고 믿고 그를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와중에 은희마저 실종되어 연락이 끊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여기서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중요한 설정 덕에 그가 겪고 있는 현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모호한 구석이 있으며 분명 트릭이 있어 어떤 것은 주인공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어떤 반전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흥미진진했는데, 반전을 먼저 꺼내자면 그가 젊은 시절부터 저지른 살인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그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자신의 (입양한) 딸이라고 굳게 믿었던 은희는 실은 딸이 아니라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라는 사실이 밝혀져요. 그리고 은희가 소개해준 남자친구인 박주태는 실은 은희의 애인이 아니라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결국 막판에 주인공은 그동안 저지른 살인 행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주인공인 김병수가 만들어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김병수는 은희가 자신이 과거 살해한 여성의 딸을 데리고 와 입양을 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은희는 주인공과 전혀 관련이 없이 자기 일을 하던 사람이에요. 어쩌면 은희와 주인공의 대화는 그의 상상이 아니라 치매 노인을 여러 번 보살핀 은희가 적당하게 맞장구를 쳐 준 결과물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만약 그럴 경우 은희가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어떤 살인의 증거를 포착하고 이후 경찰인 박주태에게 따로 연락했을 가능성이 없지도 않습니다. 박주태를 부른 이유도 자신이 보살피는 김병수가 살인범이라는 징후를 눈치챘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또 주인공의 살인 행각이 들키는 계기는 은희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그가 키우고 있다고 믿던 개가 시체가 묻힌 곳을 파헤쳤기 때문이었는데, 알고 보니 키운다고 생각한 개도 자신의 개가 아닌 주인 없는 개였으며 막판엔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났다는 결말이 드러납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김병수는 자신의 살인에 가책을 느끼는 이는 아니며, 젊은 시절에는 전쟁 직후의 혼란과 독재 정권하의 불안한 시대 분위기를 이용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은폐한 인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한국이 연쇄살인범이 활개 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증명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그가 요양보호사인 은희를 자신의 딸이라고 굳게 믿고 키우지 않던 개를 키운다고 믿은 건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사이코패스라도 나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던 걸 의미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연쇄살인범들 일화를 찾아보면 가족을 두고 멀쩡한 사람인 척 연기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그 딸을 자신이 살해한 가족의 딸이라고 여겼다는 데서 그 뒤틀린 심보가 엿보이긴 합니다만... 또한 경찰인 박주태를 살인범이라고 생각하여 경계하고 견제한 이유는 스스로를 투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살인이 들통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 여겨지고요.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눈여겨 볼 점은 주인공 김병수의 환상 속에 안형사라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진짜 형사는 박주태였으며 그가 주인공의 살인 행적을 밝히지만, 김병수의 망상 속에서는 안형사라는 가공의 인물이 살인 사건을 수사하며 주인공과 대화하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합니다. 안형사는 박주태와는 달리 사건의 범인을 파악하지 못해 무능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며 오히려 주인공과 친분을 유지하듯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는 박주태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자신의 살인이 경찰에게 들킬 리 없다고 믿고 싶고 박주태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었던 김병수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한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혼동하고 잊히는 자신의 기억을 간신히 잡으려는 듯 불교의 경전 구절을 자주 인용하는데, 어린아이까지 가차 없이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자비심이 근간인 불교의 경전을 외우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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